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녕그것은 Nov 26. 2019

서른, 별거 없다면서

지극히 정령의 이야기


 2019년 11월이 이렇게 지나갈 리 없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그랬고, 올 초 다이어리를 사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펜으로 11월을 가장 먼저 펼쳐 이리저리 끄적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11월은 내 생일이 있는 열두 달 중 가장 특별한 달이었고 나는 매년 11월 1일이 되는 그 순간부터 설명할 수 없는 붕 뜬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눈이 올듯 말듯 추위를 가득 머금은 채 이 계절을 성큼 데려온 어스름한 저녁 풍경.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코끝이 먼저 알아채는 11월의 내음 모두 나를 설레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나는 장난처럼 10월 31일부로 회사를 그만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급휴직을 통보받았다. 폭력적인 대표의 언행과 이해할 수 없는 경영방식. 직원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대표에게서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괴롭게 했던 문제였고, 나는 언제고 이 회사를 떠날 거라고, 그렇지만 우리 팀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나올 수 없어 고민이라고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함과 동시에 비상경영 체제 선포라는 메일이 도착해있었고 회사가 어려워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이 구구절절이었다. 뭘 책임진다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인 메일은 우리 팀이 무급휴직자로 '지정'되었다는 말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더불어 무급휴직이기 때문에 퇴사는 아니고 사직서는 허용한다. 그렇지만 회사의 신용도가 걸린 부분이라 권고사직은 안돼서 실업급여는 적용할 수 없다.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퇴직금은 당장 줄 수 없다는 말도 함께 부사장이 덧붙여 줬다.





 회사의 주니어들에게 사직서를 내는 일이란 마치 호랑이굴에 맨몸으로 맞설 준비를 하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었다. 사직서에 사인을 받기까지는 피할 수 없는 집의 엄청난 불행, 이 회사에서 광고를 후회 없이 해봤지만 이 길은 도저히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전직의 결심, 우울증이든 거식증이든 나의 체력이 너무 부족해 도저히 이 열정 넘치는 회사에는 부족한 인재라는 겸손한 판단 정도가 대표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이유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 다른 대행사로 이직을 하기 위해 사직서를 내는 일은 퇴직금을 포기해야 함은 물론이고 거의 부모를 죽인 원수 취급을 받을 각오는 단단히 해야 했다.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며 다닌 회사였는데 우리 팀은 하루아침에 메일 한 통으로 무급휴직자가 됐다.


 팀장님과 동기는 빠르게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실수라도 회사 근처로 가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나에게도 이런저런 자리를 소개해 주며 나보다도 나를 더 걱정해줬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한데 또 다른 회사로 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누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구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쉬라고 했다.



 11월은 깊어갔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나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봤다. '처음부터 고집부리지 말고 남들 가듯 큰 회사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시도했어야 했는데. 카피라이터가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스스로 길을 만들겠다고 날 믿은 게 잘못이었다'  꼬리를 문 생각은 나를 겨눴고 나는 무력해졌다. 큰 회사의 시스템으로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회로 인하우스 대행사의 기회가 주어졌고 면접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렇지만 나의 일하는 스타일을 보고 싶다고 했고 몇 명의 면접자가 더 있다고 했다. 집에서 과제를 하면서도 나는 계속 초조했다. 돈은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퇴직금에 대한 회사와의 씨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분명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집중을 하지 못했고 메일로 과제를 보내기로 한 시간까지 개운하지 못한 마음으로 카피를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면접을 잘 봤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탈락했다. 눈에 띄는 카피가 보이고 흥미를 끈 부분은 있었지만 열정과 부지런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면접자 중 한 명은 과제 기간 동안 회사를 두 번이나 찾아와 피드백을 받고 질문을 했으며 심지어 주말 출근까지 감행하며 과제를 제출했다고 했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했다. 뒤돌아봤더니 내 열정이 어느새 까맣게 탄 재가 된 것을 발견해서 슬펐을 뿐이다. 친구는 그래도 능력 부족 보다 열정 부족이 낫지 않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그다음 나는 내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어서 또 슬펐다. 이 전 팀장님들은 나의 어떤 부분을 높게 샀는지, 정말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고 나는 나에게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나름 가을이와 매일 산책도 하고, 마라톤도 2번이나 나갔다 왔으며 내가 좋아하는 내 생일도 잘 보냈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바로 어제 일인데 일주일은 지난 것 같고 내일 일인데 너무 쉽게 잊어버려 강박적으로 다이어리를 붙잡고 산다. 친구들은 별일 아니라고, 너도 좀 여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아침 부지런하게 카톡을 울려준다. 생일선물도 넘치게 보내줬다. 


 모든 건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언제나 그렇듯 가을이도 날 똑같이 바라보고 엄마의 잦은 전화도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내가 없다. 원래라면 누가 말하기 전에 내 자리를 광내고 쓸고 닦기에 분주했는데 이번엔 보름이 훌쩍 넘는 시간까지 더듬대는 느낌이다. 



 서른, 별거 없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별일일 줄이야.

세상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