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상속의 모든 것] 처음으로 털어놓는 이야기
집이 없지. 생각과 취향은 있어!
담배, 위스키, 그리고 너..
배우 이솜이 새하얗게 쉰 머리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던 영화 소공녀.
개봉 당시 외벽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궁금증을 자아내던 영화였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쉬는 날에도 처연해 보이는 그 영화를 섣불리 재생하지 못했다. 무슨 내용인지 예고편조차 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겨우 약속 없이 쉬는 휴일에는 밀린 예능이나 보며 안락하게 깔깔대기에 바빴다.
누군가는 점심시간이 지나 회사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길어진 회의에 대충 끼니를 넘기기도 하는 그런 낮.
(고작 두 달 백수였던 시기 중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던 그쯤이다) 내 인생 이십대는 정말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 심란함을 잔뜩 끌어안고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집안의 어떤 것도 익숙해지지 않던 그런 대낮이었다. 그런데 번뜩, 그 포스터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영화를 봐야 하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미소는 집이 없다. 가정부 일을 해서 일당을 받아 생활을 꾸려나가지만 그녀에게 쪽방칸의 월세는 한없이 버겁기만 하다. 그녀는 머리가 희어지는 병을 앓고 있어 한약도 꾸준히 먹어야 하며, 유일한 안식을 제공하는 담배와 위스키를 위한 돈은 그녀에게 월세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미소는 집을 처분하기로 하고 (사실 처분이랄 것도 없는 월세방이었지만) 남아있는 보증금을 받아 집을 떠난다. 친구들 집을 하루, 이틀 씩 전전하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실생활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지만 대학시절 추억들을 지우고 싶은 과거로 치부하고 그저 남편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친구, 아내의 외도로 온 힘을 다해 마련한 신혼집에서 폐인처럼 홀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 미소를 반갑게 맞아주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궁핍하게 살아가는 친구 등.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미소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영화의 마지막 미소는 결국 한강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무거운 캐리어와 짐을 추운 겨울 달팽이처럼 매고 다니면서도 친구들 하나하나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미소에게 내가 실로 부러웠던 건 여유였다. 좋아하는 것들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선택. 어떤 친구들은 그런 미소를 뻔뻔하다고 했다.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집을 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좋아하는 것들은 놓지 않는 미소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미소는 한강과 텐트를 선택했고 이 영화가 아름답게 남은 이유다.
그래. 사실은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신만 있다면 돈은 중요하지 않다. 좋은 말을 건네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방 한 칸.
나는 듬직한 언니, 누나였고, 똑 부러지는 친구였으며, 의리 있는 딸이었다. 그렇지만 고작 두 달의 그 시간 동안은 주변 사람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지 못했다. 동시에 나는 서른이라는 숫자로 올라섰고 올 것 같지 않았던 삼십대도 내 인생에 덜컥 찾아왔다. 시간은 전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누구보다 많은 취미생활과 다양한 주제와 관심사로 점철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돈만큼은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내 맘대로 휘둘러댔다. 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긴 했지만 욜로라는 조각배 위에 신난다고 올라타서 카드 명세서가 올 때마다 눈을 꼭 감아버린 채 그 위험한 파도타기를 즐겼던 것이다. 절대 찾아올 것 같지 않던 서른이라는 내 인생의 시간, 그리고 일어날 것 같지 않던 갑작스러운 퇴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날아오는 카드 명세서와 할부들. 나는 산산조각 나버린 욜로배와 함께 침몰했다.
그 무렵 내가 다행히 끊어둔 멤버십과 프로젝트 서포터로 헤이조이스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사실 가고 싶은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도 날 백수라 소개하며 돈이 없어 치즈를 먹을 수 없다고 눈물 섞인 농담을 던지곤 했다. 거의 대부분의 모임에서 아직 주니어에 속하기도 하며, 헤이조이스에서 만나는 멤버들은 왠지 친정식구들 같은 편안함이 있는데 다들 나를 안쓰러움 반, 귀여움 반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다. 헤이조이스에서 집으로 가는 분당선의 여정은 약 사십 분 정도 걸린다. 동네가 같은 건석님과 나는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상속. 아직도 건석님께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어렵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17년 경력의 베테랑 투자 상속 전문가이다. 나는 매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 알게 된 사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해 경악하고, 그녀는 경악하는 나를 보며 경악한다. 건석님은 돈 이야기를 건강하게 그리고 자주 양지로 꺼내 돈과 친해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기승전'돈'이었던 건석님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하긴 이렇게 돈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하철이 분당에 도착할 때쯤 들었던 그녀의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되었다.
"돈은 도구일 뿐이에요.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한 것도 맞지만 결국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싶잖아.
혹시 한 달에 만 원씩 이만 원씩 아프리카에 보내는 거 하고 있어요?
그것보다 아프리카에 학교 세우고 우물은 파야지 그게 진짜 좋은 일 아니에요?
그럼 돈, 있어야죠."
(물론 정기후원도 뜻깊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우리 성격에'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이야기였음을 감안해 주길 바란다)
돈에 있어서 막연했고 좋은 일에 있어서도 막연했고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도 막연했다. 그러니 30이라는 나이가 나한테 갑자기 들이닥친 것은 당연했다. 나에게 어쩌면 이 시기에 길고 긴 귀갓길을 함께한 사람이 건석님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상속은 좋은 가치로 벌어들인 돈과 그 가족의 고유한 철학을 다음 세대로 잘 '물려줄'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상속이 이렇게 따뜻한 단어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가치를 만들어 선한 영향력을 이 세상 곳곳에 퍼트리는 것. 바로 돈의 궁극성이다.
올바른 생각의 대물림과 나의 삼십살. 벌써 2020년 연말이 기대된다.
그때의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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