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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Oct 12. 2020

성격 좋다는 얘기, 그만하세요

[편의점에서 유럽까지] #5. 마루터 치즈의 생 모차렐라


"국장님, 저한테 성격 좋다는 얘기, 이제 하지 마세요."

2016년 입사한 첫 회사 사원 시절 국장님에게 당돌하게 이렇게 말했다. 

회식자리였는데, 참다 참다 이 말이 기어코 입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저는 xx이 성격 좋으니까, 이 말이 제일 싫어요."

곧 그렁 그렁 눈물이 맺혔던 것 같다. 

국장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 참, 또 이런 얘기 하는 애는 처음 보네."

"저는 정말 싫어요. 일을 잘한다는 게 좋지 성격 좋다는 말은 정말 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 

술자리여서 할 수 있었던 말이긴 하지만 분명히 술은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진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학교나 학원에 선생님 면담을 가면 항상 듣던 말이었다.

"xx이 성격 참 좋아요."

 스스럼없는 성격에 사람들을 워낙 좋아해 난 친구들과 선생님과도 잘 지냈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에 비해 나의 학업 성적은 항상 아쉬운 수준이었다. 엄마도 선생님들도 모두 그 부분에 대해 안타까워했고, 

나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사실 학원도 학교도 좋은 성격을 뽐내고 칭찬받으려고 가는 곳은 아니니까. 

나는 학생으로서 증명할 수 있는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은데 비해, 항상 힘겹게 미치거나 모자랐다. 

자연스럽게 성적 이외의 모든 칭찬이 

'왜 그만큼 점수는 내지 못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를 아프게 찔러댔다.


 회사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꿈꾸던 일을 하게 됐고,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 들려오는 이야기는 또 그 얘기. 성격 좋다. 

결국 말해버렸다. 저는 정말 성격 좋다는 게 너무 싫다고.

그래서 내가 변했냐고? 


 천만에, 어쩌면 더 피곤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크하고 다른 사람 인생에 신경 하나도 쓰지 않고 내 삶이나 제대로 보며 살고 싶지만, 누가 나에게 푸념이라도 시작하면 잠자는 시간도 뒤로한 채 핸드폰을 잡고 있고, a랑 b를 소개해 줬다가 애초에 내 인생에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까지 중간에서 만들어 받고 있다. 누구는 나에게 남 좋은 일만 해준다고 한다. 마치 내가 파놓은 굴에 내가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꼴.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날은 식자재 마트를 간다. 없는 게 없는 그곳은 내게 명품관 같다. 먹고 싶었던 것 다 담아야지. 평소 같았으면 살까 말까 고민했을 한 팩에 네 개만 들어있는 표고버섯에 때깔 좋은 소고기에 샐러드 야채도 종류별로 다 담고, 주말에 왠지 당길 것 같은 돼지고기 삼겹살까지 오버해서! 그래도 채 5만 원이 넘지도 않는다. 집에 있던 생모차렐라와 함께 오늘은 좀 미련하게, 어디에도 없는 샐러드를 만든다. 라면 사발에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야채를 담고 소고기 한 팩을 버섯과 함께 구워 모조리 담는다. 






 샐러드 한입에 존맛탱을 외치며 탱글한 생모차렐라를 포크로 헤집어버린다. 

미처 먹지도 않았는데 쫄깃함이 입속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첫입은 발사믹에 살짝 찍은 생모차렐라 한입. 다음은 소고기를 올려서 한입. 그다음은 버섯을 올려서 한입. 점점 줄어드는 모차렐라가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샐러드가 한 사발 넘치게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샐러드를 질릴 때까지 먹는 것은 속에 부담도 없을뿐더러 

조금 남기는 일이 있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다. 



 캐나다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와 가끔 통화를 한다. 

시차 때문에 대부분 일요일 아침잠에서 깨지도 않은 상태로 전화를 받는다.


"민민아, 난.. 정말이지.. 남 좋은 일만 하다 죽을 것 같아. 이러다 내가 죽겠어."


"남 좋은 일이라는 말, 나는 좋은데. 남 좋은 일 좀 하면 어때?

남 좋은 일이라는 말 자체도 너무 예쁜 것 같아. 누구나 할 수 없는 거잖아."


유치원 선생님의 갬성은 좀 다른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또 그런가 싶기도 하고. 



 생모차렐라는 요즘 쉽게 마트에서 구할 수 있다. 

물론 갓 만들어낸 수제 모차렐라가 맛있긴 하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아쉬운 대로 마트에서 파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 커피와 함께 조금 천천히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스트레스 한 움큼으로 털어낸 라면 사발의 샐러드와 함께하는 것도 얼마든지 땡큐, 땡큐다! 





 모차렐라는 볶음밥은 물론이고 닭갈비, 엽떡, 핫도그, 곱창까지 이제는 주변에 없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몇 안 되는 경기도 한 목장 젖소의 귀한 우유로 만들어져 이 시국에 힘들게 팔당댐 근처의 농촌 장터에 한정판으로 올라와 선착순으로 힘들게 얻어낸, 오늘 내 식탁에 올라온 생모차렐라의 처지처럼. 어쩌면 모차렐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찌어찌 힘겹게 여기까지 왔다 남 좋은 일만 하다 갑니ㄷ....




마루터 치즈의 생 모차렐라 치즈력 95%

[치즈력]은 치즈의 정령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격과 맛 식감 유통기한을 포함해 평가하는 지표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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