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움직이는섬 Oct 03. 2016

#08. 타인의 시선 벗어버리기

수영장만큼 신체의 노출이 많은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일상복이 아닌 수영복을 입으니까. 수영복은 신체를 가리는 부분이 적을뿐더러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남들 보여주기 다소 민망한 의복인 것 같다. 그래서 수영장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수영복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몸매를 적나라하게 타인에게 보여줘야 하므로.   


그러나 반대로 수영복은 자신감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들에게 내 몸의 윤곽을 가리지 않고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본인에게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의 SNS에는 수영복 사진이 빠지지 않고 올라와 있는 것 같다. 물론 동일한 수영복 사진이라도 같은 의미를 내포한 건 아니겠지만. 나 몸매 쩔지? 보고 찬양해라!, 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으니까 타인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한 사람도 있다. 뭐가 됐든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공부를 했던 사람답게 나는 외계인 E.T와 유사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 팔다리는 마르고, 배와 옆구리가 볼록 튀어나온,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는 움찔하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그런 친근한 체형이다. 그래서 수영장을 등록했을 때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될 테니까. 그곳에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를 꾸밀 수 있는 겉치레가 딱히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타인에게 노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그대로 맡겨둔다는 건. 물론 수영모에 물안경을 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존 철학자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있다. “타자는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대체 이 아저씨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타인에게 저런 악담을 퍼부을까. 저 문구만 놓고 본다면,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작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인터넷 댓글로 욕설을 달며 쾌감을 느끼는 비사회적 인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저 아저씨는 철학도 하고, 소설도 쓰고, 극작가도 하고, 정치 활동도 하는 당대의 핫 셀럽이었다. 물론 그가 쓴 소설이 상당히 재미없기는 하지만. 저런 말을 한 이유가 단지 중2병의 영향이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20세기 최초의 지성으로 뽑히는 인물이니까. 물론 웬만한 지성도 중2 시절을 거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그는 저 명제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너무나 예속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살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남의 눈 신경 쓰느라 제 할 일 못하고 살아가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랄까. 또는 사람들이 남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고, 멋대로 판단하길 좋아해서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준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니들이 규정하는 나 말고, 내가 원하는 나로서 살면 안 되겠니, 이 지옥 같은 인간들아?, 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에 비춰본다면, 사르트르가 걱정했던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아니 아주 잘 알 것 같다.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길 좋아하고, 반대로 남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꾸미는 건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니까. 남들 보는 눈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생각들. 너무 많은 예시가 떠올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도 어려울 정도이다. 성형 공화국?, 허례허식이 가득한 경조사?, 유행에 민감한 옷차림?, 명품 가방, 멋진 차, 좋은 집, 남들도 다 하는데 우리 아이도 백만 원짜리 유모차 정도는 타 줘야 하고, 이국 호텔 수영장에서 보낸 여름휴가 정도는 SNS에 인증해줘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급을 나누는 이런 풍토가 헬조선을 만드는 재료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일지도.     


물론 그렇다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제멋대로 살라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고 있기에, 서로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멋대로 하는 인간과 사는 것도 또 다른 지옥일 수도 있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타자의 시선은 너무 많은 삶에 침범해서, 우리를 부당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말 그대로 너무 과한 시선의 경쟁. 보여주기 식 사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코 흘리던 유년기 시절이야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 수밖에 없으니 불만은 없지만, 머리가 조금 큰 뒤에도 나는 타인들이 규정한 삶의 방식을 충실히 따른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다. 물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문제는 취업을 준비하는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맞춰서 자기를 꾸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직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직업도 있는 법이니까. 남들 눈에 부끄럽지 않은, 더 나아가 남들이 그럴싸하게 평가해주는 직장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회한과 자조가 들곤 한다.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요구에 맞추려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게 만드는 과잉된 시선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어야 할 텐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타자의 욕망인지를 구분할  있어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타인들의 시선과 말 안에서만 살아왔고, 윌슨이 있을 법한 무인도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가 수많은 시선으로 나를 규정하고 있다면, 일단은 그 모든 것을 최대한 벗어버리는 수밖에. 비우고, 또 비우고, 벗어버리면, 타인이 규정한 내가 아니라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드러날 테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상복을 벗어버리고 수영복을 입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자신의 모습이 별 볼일 없을 수도 있다. 수영복을 입고 적나라하게 노출된 자신의 몸이 부끄러운 것처럼. 그것만큼 참기 힘든 일도 없으니까. 그런데 수영을 하는데 굳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자신의 목적이 런웨이를 걷는 게 아니라 수영을 위한 것이라면. 그때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물의 저항만을 높일 뿐.




매거진의 이전글 #07. 낯선 첫 경험에 이름 붙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