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 내게는 서점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한동안 웅크린 곰이 되어 집과 회사만 오가다 보니 사람들의 표정과 풍경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내게는 서점이다. 나를 환기하고, 토닥여주는 서점.
서귀포에 있는 서점 어나더페이지에 가기 위해 긴 잠에서 깨어나 오랜만에 걸음을 내디뎠다. 버스에 탄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마스크가 사람들의 표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
두 시간여를 달려 서귀포 대정읍에 도착했다. 어나더페이지는 대정초등학교 옆, 작은 골목길에 있다. 파란색 차양막 아래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마시안 강아지상이 먼저 반긴다. 목소리로만 인사를 건네던 사장님이 이내 어디선가 나타났다. 서고에 있는 책은 판매하는 책이고, 여닫이문 안에 있는 책은 마음껏 꺼내 읽어도 된다고 한다.
짐을 풀고 제주 으름꽃덩굴차를 주문했다. 생소한 이름인데 구수하니 맛이 좋다. 서점이 크지 않아 서고가 한눈에 들어온다. 기후변화, 환경, 사회 등 다양한 이슈의 책이 많았다. 송악산 개발에 관한 리플렛이 눈에 띄었다. 왜 송악산을 보존해야 하는지 다양한 근거자료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리플렛을 읽고 여닫이문 안에서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집어 들었다. 종종 사회에서 예민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힘든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책은 제목처럼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결코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주기도 했다.
서점 곳곳에 놓인 친환경 제품을 보니 사장님의 관심사가 나와 비슷한 듯해서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서점을 운영한 지는 한 달이 조금 넘었고, 제주 토박이였으나 한동안 제주를 떠나 있었다고 한다. 리플렛에서 읽었던 송악산 이야기도 듣고 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다가 우리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했던 동료임을 알게 됐다. 이 분야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것은 꽤 드문 일, 특히 제주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쩐지 서점 분위기나 사장님 취향이나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우린 반가운 친구, 동료가 되었다.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언젠가 서점에서 함께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반갑고, 신기한 인연이었다.
거리에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감이 계절을 닮아가고 있었고, 갈대들도 이제야 자신의 가치를 뽐냈다. 오랜만에 Handmade life shop에 갔다. Handmade life shop은 제로 웨이스트 제품을 파는 가게다. 가끔 클래스도 운영한다. 어디서 찾아냈을까 싶은 물건들을 수소문해 판매하는 사장님의 노력이 가게 곳곳에서 엿보인다. 손님으로서도 믿고 살 수밖에 없다.
이곳 사장님과도 한림에서 우연히 만나 제주에서 여자로,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해진 사이다. 사장님은 변함없이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아주었고, 시원한 차도 내주었다. 마침 가게 안에 벌이 들어왔는데, 벌이 다시 살아나가길 바라며 설탕물을 타 먹이고 있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 작은 생명조차 허투루 다루지 않는 사장님의 마음에 내 마음마저 맑아진다. 벌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코로나19로 갑작스레 변화된 우리의 삶과 인간에 대한 한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움츠려 있던 내게 이번 여정은 취향이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 위로가 된 하루였다. 팬데믹이 일상이 되어버린 가운데 그 일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하기를 바라며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사를 나누며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종식이 정말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안전하게 제주 서점 여행을 계속할 예정이다.
글/사진 chantrea
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집을 이고 다니며 생활하고 싶습니다. 4년 동안의 캄보디아 생활을 뒤로 하고 지금은 제주에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