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 3부작 중 마지막 자기와 자기실현이다.
이 책에서는 자기와 자기실현을 어떻게 하는지
자기 실현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우리 문화에서 나타나는 자기실현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풀어 놓았다.
<논어>의 인격성숙론과 퇴계의 <천명신도>에서 심리학적으로 깊이 고찰해야 하는 자기원형의 개현을 상징함을 말하고 있다.
왜 자기실현인가?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와 자기를 구분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지만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 정신의 중심이다.
전체 정신은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은 발달, 분화, 또는 강화될지언정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실현이란 아직 모르는 크기의 전인격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아는 알고 있는 정신세계, 즉 의식계의 주인이므로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아의 확대’’자아의 발달’혹은 ‘자아기능의 분화’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실현은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다
자아가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해가는 가운데 형성되는 행동양식, 일종의 기능 콤플렉스를 융은 페르조나라고 했다.
그것은 사회집단이 개인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갈 때 생긴다. ‘사회적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자기란 무엇인가.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인간의 모든 정신 현상 전체를 자기라 한다.
자기는 전체인격의 통일성과 전일성을 나타낸다. 즉 말하자면 ‘하나가 된 인격’이다.
자아의식만으로는 결코 하나가 된 인격이라 할 수 없다.
‘자기’는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상징들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신의 상징들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자기와 신이 비록 실제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같은지
나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개성화(자기실현)는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의 종교적 과정으로 이에 적합한 종교적 자세를 요구합니다. 즉 자아의지는
신의 의지에 순종합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신 대신 자기를 말합니다.
경험적으로 그것이 더 옳습니다.
융이 말하는 개성이란 자기와 같은 말인데 그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다. 각 개인은 모두 일회적인 독특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인간적 토대 위에 있다. 그러므로 남들과는 다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개인 지상주의는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과 다른 것이다. 진정한 개성은 전체 정신을 포괄하는 것, 즉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그 사람 그 자체인 것이다.
자기실현이란 무엇인가.
자기실현의 기회는 느닷없는 결혼생활의 파탄, 절망과 병고뿐 아니라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과 정신적 위기에 처했을 때 찾아온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잘 될 때는 사실 아무것도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
치료자는 치료의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 남녀가 사랑에 성공한 경우보다는 실패의 쓴 잔을
마셨을 때,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자기실현의 구체적인 방법은 분석을 통한 무의식의
의식화다.
페르조나의 인식은 물론 무의식의 관찰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너무 완벽하게 체면을 지키는 사람의 꿈속에는 옷차림이 허술하다든가. 바지를 안 입었다든가. 화장실에 오물이 많다든가, 너무 큰 구두를 신도록 강요된다든가, 깡패와 창녀에게 시달리다든가 하는 , 의식의 완벽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나타날 수 있다.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무엇보다도 그림자의 인식이다.
그 뒤에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가 진행되고 이를 통해 자기와의 대면이 이루어진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있는 열등한 인격이다.
‘내가’좋아하지 않는 것, 남들도 싫어하는 것, 그래서 의식에서 배제되어 무의식으로 들어가 버린 자아의식의 여러 가지 성격 측면으로 이루어진다.
심청과 바리공주 설화는 한 단계 높은 자기실현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두 이야기는 스스로 상처 입은 자, 죽음을 겪고 극복한 자만이 남을 치료할 수 있다는 원시사회로부터 내려오는 치유자의 조건을 말하고 있다.
모두 버리는 것, 세상의 권세나 명예도 경제적 안락도 다 버리고 무의식에 몸을 맡기는 태도가 결국 다시 사는 길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심청전에서 심청은 심봉사의 아니마라 지칭하는 것이 그리 부적합한 것 같지 않다.
심청을 심봉사의 아미나라고 보면 이 이야기는 남성의 자기혁신을 촉구하는 깊은 의미가 담긴 것이 될 것이다. 심봉사의 긍정적 아니마는 곽 씨 부인과 부정적 아니마는 뺑덕어미이다
곽씨 부인의 아니마는 심청에게 옮겨갔다.
심봉사의 실수는 우연처럼 저질러진다.
세상의 숱한 사기꾼 말에 일순간 현혹되어 큰돈을 날리는 오늘의 세태와 다름없다.
‘심청전’은 그런 감정 희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니 ‘심청’이라는 아니마 원형이 자율적으로 의식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서 의식과 관계를 끊고 떠나버린다. 심혼이 상실된 의식계는 황폐함이 더 해지고 만성적인 우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 오랜 침울한 시기에 무의식에서는 재생을 준비하게 된다. 자기원형의 상징, 연꽃에 실려 아니마는 의식화된다. 그리고 집단의식의 맹목성을 깨뜨리고 눈뜨게 한다 ‘심청전’에서 마지막 눈뜨는 과정은 매우 한국적인 귀결이다.
개성을 가진 하나하나의 개인은 집단의 기준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회적인 내적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무의식을 도외시하고 인간 의식의 표응을 지지하는 지지요법이나 무의식을 한낱 억압된 충동으로 간주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 있는 누미노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자아의 갈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사람이 신경증이라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다만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중년 이후의 그와 같은 권태, 우울, 공허, 불안은 자기실현의 필요성을 알리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