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 아니무스 II

첫사랑은 나의 아니무스

by 소소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투사나 잘못된 투사로 인해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한다.

잘못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좋지 않은 관계로 타인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어떻게 어디서 나타나며 알 수 있을까? 꿈을 분석하면 내안의 아니무스를 발견하고 알 수 있다 . 꿈 뿐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투사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헤어지기 전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너 자신이 바뀌어야해. 라는 충고를 듣는다.

자신이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안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아니마. 아니무스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아니마 아니무스가 어떻게 투사가 되는지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준다.


한국인의 꿈에 나타난 아니마. 아니무스상


-아니마, 남성 속의 여성


꿈을 이해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무엇보다 꿈은 대단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비슷한 꿈의 내용도 개인에 따라, 그 개인이 처한 현실 상황에 따라, 꿈꿀 당시 의식 상황에 따라, 꿈의 내용에 대한 그 개인의 연상과 문맥에 따라 그 뜻이 다르다.

물론 보편적인 주제가 있고 전형적인 주제가 있지만 그 꿈의 보편성을 알려면 그 개별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마가 남성 속의 여성, 아니무스가 여성 속의 남성이라면 남성의 꿈에 나오는 모든 여성, 여성의 꿈에 나오는 모든 남성은 내적 인격인 아니마. 아니무스이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이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의 꿈에 나타나는 여성상이 모두 아니마이고, 여성의 꿈에 나타나는 남성상이 모두 아니무스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성의 꿈에서 아니마는 흔히 사랑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그래서 성적인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꿈속에서의 성적인 관계는 단순히 성충동의 억압에 의한 무의식의 보상작용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언제나 생물학적인 욕구 충족의 차원을 넘어 상징적으로 심적인 융합의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꿈꾼 사람의 꿈이 대한 연상과 꿈의 맥락에 따라 신중히 그 뜻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의 접촉이나 성적 행위 없이도 대환희와 통일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한 전일감을 진정으로 자각된 정신적 대극 합일로서가 아니라 생리적 성적 쾌락이나

알코올과 도박, 약물을 통해서만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전일감의 착각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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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대극 합일은 고통스러운 대극 간의 긴장을 견디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감추지 않는다, 가르친다"라는 융의 주장은 다음 꿈에도 적용된다. 꿈은 의식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때 필요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관심의 방향을 돌리도록 촉구한다. 무의식이 의식의 일방성에 대한 보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니마는 바로 그런 보상적 역할을 한다.


바깥일 때문에 바쁘게 지내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꿈에 기독교 문명의 오랜 전통과 신앙의 뿌리를 대변하는 50대 유럽 여인이 나타나 지친 표정으로 물을 좀 달라고 한다.


이 유럽 여인은 그의 연상에 따르면 그의 아니마, 잊었던 그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이루는 감정적 토대를 상징한다. 그가 꿈에서 그녀에게 물을 주었듯이 이 꿈은 바깥일, 즉 사회활동 때문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함을 가리킨다.


-아니무스, 여성 속의 남성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아니무스도 다양한 모습과 발전단계에 있는 남성상들로서 꿈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아니마처럼 여성의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자기실현의 과정을 돕는다.


여성다운 사람일수록 무의식에서 깡패, 폭력조직, 마피아단 같은 인물들에게 쫓기거나 곤욕을 치른다.

그러므로 꿈에 등장하는 아니무스가 험악할 때 그 여성의 의식은 반대로 지나치게 온순한 경우가 흔하다.

부정적 아니무스는 때로는 그러한 일방적인 ‘여성적 여성’을 자극하고 그 일방성을 수정하려는 충동이라 할 수 있다.


밖에서 보는 한국인의 아니마.아니무스상

아니마.아니무스에 관한 융의 설명을 들었는데도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해 보라고 권한다. 당신은 어떤 이성에게 첫눈에 반한 경험이 없었는가. 상대는 꼭 애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여성에게는 남자 선생님이 반할 정도로 매력적인 이성이다.

자신의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을 상대방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는 사정없이 ‘이성’을 빼앗고 장님으로 만들며 그 뒤에는 이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남성의 아니마나 여성의 아니무스는 그런 운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무의식의 원형적 배정으로 일어난 이른바 운명적인 사랑의 실수를 저지른다.

사랑의 실패한 사람은 자기가 상대방에서 본 것이 최소한 ‘허상’이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의 투사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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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내 욕심을 채우고 상대를 자기의 이상상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자아중심성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랑에 성공하면 이러한 측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집단과 뇌동하지 않고 개성을 지킬 때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이고 트릭스터는 좋은 안내 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내적 인격, 아니마, 아니무스를 밖에서 보지 않고 안에서 봄으로써만 가능하다.


-한국 문화에 나타난 아니마. 아니무스

김춘수의 시 [꽃]은 매우 건강한, 너무도 당연한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꽃은 가장 사랑스럽고 값진 것, 때론 전체를 개현한 상태다. 꽃이 된다 함은 자기실현을 한다는 것에 견줄 수 있다. 그러자면 이름 없는 것에서 이름 있는 것으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된 존재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 변환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너와 나의 만남의 과정이다.

남성은 여성의 무의식에 잠자는 남성성을 일깨우고 여성은 남성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여성성을 일깨우고 의식화한다.

그리하면 인간은 정말 모두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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