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창문을 열자 소스라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뺨과 팔에 닿는다. 저녁 반찬으로 고기를 구우면서 냄새 때문에 환풍기를 켜고 주방 개수대 위 작은 창문을 연다. 밖이 추운 걸 알고 숨을 참은 채 단단히 마음먹고 창문을 열지만, 매번 차가운 바람에 몸이 경직되고 마음도 얼어붙는다. 찬바람을 1분도 못 견디고 후다닥 다시 창문을 닫는다.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달리지?
라며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제도 못 달렸으니 오늘은 꼭 달려야 해!'라고 또 다른 내가 외쳐보지만 이미 한풀 꺾인 의지는 살아나지 않는다. 12월, 육퇴 후 한밤 달리기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러닝 17개월 차, 이제 달리기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달리기는 그 자체로 순도 높은 즐거움이고, 성장을 만끽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하루하루를 활기찬 에너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샘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추워도 내가 당!연!히! 용감하게 집 밖을 나서서 달릴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고, 장담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내 열렬한 달리기 사랑은 추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항상 12월이 고비다.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변명해 본다.) 나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나름의 이유를 대자면 겨울에도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 포근한 부산에서 태어나 24년간 살았다. 8월 생이라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은 즐기지만, 추위엔 더없이 나약하다. 작년 12월 5일, 평소처럼 밤에 달리러 나갔다가 찬 바람에 눈 뜨기가 힘들고, 얼굴은 꽁꽁 얼어붙는 데다, 이빨까지 시려서 채 100m도 못 가서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곤 12월 둘째 주, 셋째 주엔 깔끔하게 달리기를 쉬었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포기했다.)
올 겨울엔 추위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의지력 고갈! 많은 심리학 책에서 의지력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어서 사용할수록 고갈된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걸 실감하고 있다. 작년에 비해 올해 육아 체력 소모가 크다. 3살과 7개월 아기를 돌보는 거랑 4살과 2살 남아 둘과 몸으로 부대끼며 놀아주는 게 이렇게 차이가 클 줄 몰랐다. "아구, 애들 어려서 제일 힘들 때네."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말이 정말 맞다.
보통 어린이집 하원 후에 놀이터에서 두 시간 놀아주고 집에 와서 목욕시키고 저녁 먹이고 다시 본격적으로 노는데,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요즘 첫째에게 책을 읽어주면, 둘째가 꼭 글밥 많은 형 책을 들고 와선 읽어달라고 조른다. 형 책과 번갈아 읽어주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자기에게 집중 안 하면 내 무릎에서 발버둥을 치며 울고 보챈다. 두 명 책을 동시에 읽어주는 신기를 발휘해 보지만, 둘 다 만족하지 못해 아우성친다. 그렇게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애쓰다 보면 체력과 함께 달리러 나가겠다는 의지가 바닥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보통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달리는데, 12월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밖에 달리지 못했다. 물론 아예 운동을 하지 않은 건 아니고, 집에서 유튜브 영상을 보며 홈트를 했다. 그래도 달리러 나가고 싶은데 자주 포기하니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좌절감이 크다. 게다가 달리기를 쉬니 갖은 부작용에 시달린다. 일단 빨리 잠들지 못하고 한두 시간씩 뒤척이다가 자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체력이 떨어지니 글을 쓰고 책을 읽을 때 집중이 안된다. 그래서 부족한 에너지를 달달한 간식과 커피로 채우게 돼서 속이 부대끼고 컨디션이 떨어진다. 결국 이것이 의지력 고갈의 한 원인이 되어, 밤에 달리기 대신 따뜻한 집에 머무는 걸 선택한다.'어떻게 해야 꾸준히 달릴 수 있을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새벽에 달리면 어떨까?
하루 중 언제 나가도 춥다면 추위를 정면으로 돌파해 새벽에 달리는 것이다. 에너지가 가장 충만하고, 의지력이 가장 높은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나가서 달리려 한다. 밤에 달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하루를 사는 것보다 새벽에 달려버리면 후련하고, 하루의 주도권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년 3월에 복직하게 되면 밤 시간보다는 새벽에 달리는 게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곧 반짝반짝 빛나는 2022년이라는 새해를 맞이하니까. 새벽 달리기는 내게 잘 어울리는 새해 습관이 될 것이다.
나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실행하는 '행동주의자'를 추구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새벽 달리기를 시작한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아주 작은 목표'를 세웠다.
한 달 계획>
+일어나는 시간 : 새벽 5시 반
첫 주 : 주 5회 달리기, 주말 회복, 거리 1Km
둘째 주 : 주 5회 달리기, 주말 회복, 거리 2Km
셋째 주 : 주 3회 달리기, 주 2회 근력 운동, 거리 3Km
넷째 주 : 주 3회 달리기, 주 2회 근력 운동, 거리는 3Km(+2Km)
목표는 '새벽에 달리는 습관가지기'이다.새벽 달리기를 '머리 쓰지 않고 쉽게 실행'하기 위해 점퍼, 장갑, 운동화 등은 미리 현관 앞에 준비해 둔다.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옷 입고 집에서 팔 벌려 뛰기 100번으로 몸을 살짝 데우고 나간다. 빨리 달리거나, 멀리 달리는 것까지는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지금 몸 컨디션을 유지하며 겨울엔 꾸준히 달리는 것만 이어가도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건 플랜 B. 위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 대비해서 첫 번째,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 눈이 얼어서 길이 미끄러운 날은 헬스장에서 달린다. 두 번째, 늦게 일어나거나 몸이 좋지 않은 날은 주말 새벽에 달려서 주 5회 달리기를 지킨다.
새벽 달리기가 처음은 아니다. 가끔 남편 야근이 예정되어 있는 날은 새벽에 조용히 집을 나서서 달리곤 했다. 새벽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은 '내 몸과 마음에 의미 있는 일로 일상의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새벽 5시 반이지만 벌써 불이 켜진 사무실이 보였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좋은 에너지 가득한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원을 뛰는데 사람이 없어서 나만을 위한 달리기 공간 같았다. 곧 시끌벅적하고 곧 생기 있게 피어날 공간들을 먼저 만나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밤 달리기가 고단한 하루를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이라면, 새벽 달리기는 희망차게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운동이라는 중요한 과업을 아침에 끝냈다는 사실을 자신감을 안겨줬다.
분명 좋은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그것도 한겨울 새벽에 달리기로 결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든데, 새벽에 일어나 달릴 수 있을까?'
'너무 추운데 문 밖을 나설 수 있을까?'
'겨울 칼바람을 견디며 달릴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많이 고민했다.
결정에 도움을 받고 싶어 브런치에서 '새벽 달리기', '겨울 달리기' 키워드를 검색해서 많은 글을 읽었다. 작가님들의 생생한 달리기 경험과 새벽 달리기가 몸과 마음에 미치는 좋은 영향을 읽으며 옳은 결정을 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그중 Chuchu Pie 작가님이 '가장 괴로운 5분'이라는 글에서 '가장 괴로운 5분을 이겨내고 나면 나머지23시간 55분이 즐거워진다.'라고 한 말이 내게 결정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