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요즘도 꾸준히 달리고 있죠?"
"네. 달리는 조금씩 거리도 늘고, 속도도 빨라져서 달리는 게 재밌어요."
"와. 페이스 얼마나 나와요?"
"요즘은 열심히 달리면 1Km당 6분 40초 정도 나와요."
"역시! 나는 8분 전후로 뛰어. 진짜 느리지? 쌤은 '러너'고 나는 '조거'야."
"저도 느린걸요."
친한 쌤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쌤은 3년 전에 러닝 앱의 도움이나 같이 달리는 사람 없이 혼자 100m를 달리는 것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가로등 하나씩을 정복하며 아주 조금씩 거리를 늘려 요즘은 6Km를 달리게 된 '집념의 달림이'다. 매일 새벽, 달리면서 땀을 흠뻑 내곤 집에 와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사발 들이키면 세상 행복하다는 그녀! 쌤도 나도 그저 느린 달림이라고 생각했는데 러너와 조거라고 구분 지으니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내가 쌤보다 속도가 빠르다는 말인가? 쌤은 아침에 뛰니까 조거라는 건가?' 속으로만 생각하다 다른 주제 이야기로 넘어갔다.
(*실제로 1996년에 조깅(jogging)의 '조' 자가 한자 아침 조(朝)로 해석돼 아침에 뛰는 운동으로, 밤에 하는 조깅은 '석(夕)깅', '야(夜)깅'으로 분류해서 쓴 예가 있다고 한다.)
그 후 달리기에 대한 글을 쓰려고 여러 자료를 검색하다가 '조깅 VS 러닝 모르면 아무리 달려도 '몸도 맘도' 상한다.'는 매일경제 기사(2020년 10월 23일)를 발견했다. 기사에서는 조깅과 러닝을 페이스와 강도로 구분해 설명한다. 조깅은 1Km를 7분 30초에 뛰는 페이스의 달리기이고 러닝은 1Km를 5분에 뛰는 페이스의 달리기를 말한다. 조깅은 가볍게 뛰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달리기이고, 러닝은 초심자가 무산소 운동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고강도 달리기이다.
이럴 수가! 이 기사에 따르면 1Km를 5분에 뛰는 건 꿈도 못 꾸는 나는 영락없는 '조거'였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단 한 번도 '러너'였던 적이 없었다!!! 1년 넘게 페이스 7분-8분에 머물다가 6분 대에 간신히 발을 담갔는데, 5분대로 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치열하게 속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단 말인가? 속상하고 암담했다. 기사 뒤쪽에서 조깅과 러닝을 구분할 때는 속도보다 최대심박수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게 중요하며 최대심박수의 60~70% 범위의 운동 강도라면 조깅 영역이고, 최대심박수의 70~85% 운동 강도라면 러닝 영역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조거와 러너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도 있었다. <오늘부터 달리기를 합니다>(이진이, 한빛 라이프)의 저자 지니 코치는 조거와 러너를 '마라톤 대회 참가 여부'로 구분한다고 말한다. 달리기에 '경쟁'이라는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조거는 몸의 긴장을 풀고 천천히 달리며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고, 러너는 더 빨리 달리고 싶은 욕심으로 대회에 참여해 경쟁하며 달리는 사람이다.
'경쟁'이라는 요소로 판단한다면 나는 '러너'보다 '조거'에 가까웠다. 네 번의 마라톤에 참가했지만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혼자 달리는 온라인 마라톤이었고,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내 성장에 목표를 뒀기 때문이다.
제프 겔러웨이는 그의 저서 <마라톤>에서 러너를 발전 과정에 따라 초보자, 조거, 경쟁자, 선수, 러너의 다섯 단계로 구분해 설명한다. 1단계는 초보자(The Beginner)로 달리기 싫은 마음을 버리고 달리기의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이다. 2단계 조거(The Jogger)는 달릴 때 안정감을 느끼고, 달리기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을 뜻한다. 3단계는 경쟁자(The competitor)로 '경쟁'을 통한 성취감이 달리기의 주요 목표인 사람을 뜻한다. 경쟁자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며 속도를 높이고, 새로운 훈련 기술을 모두 섭렵한다. 4단계는 선수(The Athlete)로 자기가 될 수 있는 '최고'가 되려는 사람이다. 선수는 한 경주에서의 빠른 기록보다 완만한 성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5단계 러너(The Runner)는 초보자, 조거, 경쟁자, 선수의 모든 단계 요소들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풍요롭게 달리는 인생을 사람을 말한다. 러너의 종착지라 할 수 있다.
나는 몇 단계에 해당될까? 초보자와는 달리 달리기에 중독되어 있지만, 높은 경지-경쟁적 러너들이나 마라토너 같은-에 위축되어 있는 사람. 비기너와는 달리 옛날 운동을 하지 않던 시절과는 중요한 단절을 이뤘고, 활동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게 된 2단계 '조거'의 성격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내 성장에 집중해 내가 될 수 있는 최고가 되려는 4단계 '선수'를 추구하는 면도 조금은 있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고, 조금씩 거리를 늘려 더 먼 거리도 도전하려고 한다. 모든 단계를 꼭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단계를 경험하고 초월한 5단계 러너(The Runner)는 나에게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이상향 같은 존재였다.
이제 초보라는 말은 떼도 되지 않아요?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난 후 내가 쓴 글에 블로그 이웃이 댓글을 남겼다.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지만 내 블로그명은 여전히 '초보 러너 성장 프로젝트'였다. '조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달리기 실력에 자신이 없었고, 때론 느린 속도가 부끄러울 때도 있어 스스로를 '초보 러너'라 칭했다. 어쩌면 초보 러너는 조거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로 실력을 키우고 경험을 해봐야 '러너'가 될 수 있는걸까? 풀 마라톤을 완주하면 당당하게 러너라고 할 수 있을까? 마라톤 대회에서 입상 정도는 해야 러너라고 할 수 있을까? 풀 마라톤에서 Sub-3을 기록하면 러너가 될까? 트레일 러닝이나 사막 레이스 정도는 경험해봐야 할까? 언제쯤 자신 있게 나 스스로를 '러너'라고 생각하게 될지... 끝이 보이지 않는 달리기 세계에서 방황하고 고민했다. 실제로 달려보면 정말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기를 즐기는 러너들이 많은데도, 세상의 기준인 속도, 운동 강도, 발전 과정 등으로 나를 판단하며 스스로를 작고 볼품없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아주 작은 습관의 힘>(제임스 클리어, 비즈니스북스)에서 내게 의미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저자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부터 뚜렷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부상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달리는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리하지 않고, 더 빨리 또는 더 멀리 달려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오래 달리기를 즐기기 위해서 나만의 '러너' 정체성을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러너'는 달리기 그 자체의 순도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달리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오롯이 몰입하는 사람이다.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조금씩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다.
달리면서 세상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사람이다.
일, 가족, 취미, 공헌, 운동 등 삶의 다양한 분야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만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느리게 일어나고 성장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출 필요도 없다. 요즘엔 완벽성보다 개인의 취향과 특이성에 주목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우리 조거, 초보 러너, 런린이를 지우고 나만의 색깔을 담은 '러너' 정체성을 가지자. 자부심이라는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나가면 결국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
나는 '러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