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에미상을 받았을 당시, 황동혁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작품을 만드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치아가 여섯 개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잇몸이 욱씬욱씬하며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출산할 때 배에 힘을 주느라 이를 너무 세게 악물어서 어금니 두 개가 깨졌었는데……. 세계인이 열광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건 애 낳는 것보다 세 배는 더 무서운 일이구나 싶었다.
며칠 뒤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글쎄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 찍다가 치아가 여섯 개나 빠졌대. 세 개쯤 빠지면 그만 둬야지 너무한 거 아니야?” 내 말에 친구가 대답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뭘 세 개까지 기다려… 하나도 빠지기 전에 힘들면 그만 둬야지.” 심드렁한 말투 속에 든 진리에 퍼뜩 각성했다. 일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건만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7년 전 산후조리 시절을 생각했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나는 친정집 안방에 육아 살림을 풀고 한 달간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스무 해 넘게 살았던 집이니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어쩐지 낯선 곳에 혼자 뚝 떨어진 듯 외롭고 무서웠다. 그 시절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아기라는 존재 그 자체였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없던 인간이 오늘은 내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달의 임신 기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친정엄마가 잠든 아기를 눕히고 방을 나가면 나는 그로부터 다섯 뼘쯤 멀찍이 떨어져서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소한 눈동자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꼭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속 대사가 귓속을 맴돌았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아기는 주로 신기했고 또 가끔은 예뻤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슬프고 어지럽기만한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저 자그마한 손이 내 발목을 꽉 잡고 있어서 다시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루는 아기를 안아 어르는 친정엄마 옆에 앉아서 훌쩍훌쩍 눈물을 훔쳤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가 등짝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너는 출산한 지 한 달도 안 된 애가 그게 걱정이니? 아기를 낳았으면 잘 키울 생각부터 해야지!” 그러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어떻게 스물 셋에 엄마가 되었을까? 인생이 아깝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나도 엄마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찌저찌 시간은 흘러갔고 아기의 백일이 지나며 나는 일터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슷한 처지를 앞서 겪은 워킹맘 동료들이 나에게 일을 맡겨준 덕분이었다.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단발적인 업무들만 맡다 보니 수입은 반의 반의 반토막이 났지만 그래도 적게 버는 것이 아예 안 버는 것보다는 나았다. 온종일 육아와 살림에 시달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와중에도 ‘쉬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불안을 견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산 후 백일의 휴가는 아기를 두고 일하러 나가는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자 또 다른 불안이 나를 덮쳤다. 나는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사람. 한 편의 글을, 하나의 인터뷰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색과 담금질이 필요한데 엄마가 되어 일과 육아를 양립한다는 것은 조각조각난 시간을 가지고 긴 시계열의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터에서 비혼인 동료들을 만나면 너무 겁이 나서 울고만 싶어져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루는 심리상담사에게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심리상담사는 왜 내가 그들보다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물었다. “일을 못하게 되면 아무도 저를 불러주지 않을 테니까요.” 나의 대답에 심리상담사는 일이 모두 끊겼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답변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최악을 가정해도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내가 그려질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최악’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일을 지속하려고 아등바등했지만 내 삶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코로나19의 난리통 속에서 어린이집에 입소한 아이는 자주 열이 났다. 그 바람에 한 달에 열흘 가량은 등원을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2년 뒤 코로나19가 소강되자 난생처음 마스크를 벗은 아이는 폐렴, 아데노바이러스, 장염, 수두 등 온갖 잔병치레를 연달아 앓았다. 일을 하려고 기관에 보내면 아이가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자꾸 펼쳐졌고 그 상황을 책임져야하는 것은 단연 엄마인 나였다. 그러는 사이 화분의 새싹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자라듯 내 안의 모성애도 무성해졌다. 신기한 것은 마음 안에 아이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커질수록 일의 자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된 요즘의 나는 직업인보다 엄마에 더 어울리는 삶을 산다. 여전히 일터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아르바이트에 가깝고, 지금보다 업무 시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흐지부지 흘려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가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등쿠션과 안방 귀퉁이 벽을 차지한 진갈색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없으면 금세 잠이 깨서 우는 아이 때문에 도무지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몇 년 전에 산 것이다. 아이가 잠들면 그 옆에 등쿠션을 두고 앉아 책을 읽고, 더 깊이 잠들어 숨소리가 거칠어지면 살금살금 책상으로 가서 글을 쓰고 싶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물건들. 당근마켓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불현듯 돌아보면 아이의 어린시절 한 페이지가 지우개로 박박 지워진 것 같다. 일과 육아를 둘 다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나의 모습만 보일 뿐, 아이와의 추억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다. 그 당시의 나는 왜 그렇게 일에 매달렸던 걸까? 아이가 얼마나 빨리 자라는 줄도 모르고…. 아마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호명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바쁘지 않은 프리랜서에게 “요즘 무슨 일 해?”라는 질문처럼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없다.
202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클라우디아 골딘’은 여성의 학위, 자격요건, 직위가 향상된 사회에서도 성별소득격차가 사라지지 않는 원인으로 ‘탐욕스러운 일자리(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일에 전념할수록 인정을 받는 일자리)’와 ‘돌봄’을 꼽았다. 그중에서도 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라는 지적에 더 눈길이 간다. 돌봄이 엄마에게만 전가되는 사회의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애주기에 찾아오는 출산과 돌봄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기 어렵도록 만드는 데는 치열하게 일하고 성취해야 사회와 타인으로부터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통념이 작용한다. 출산 후 잠시 일을 쉬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줄어든 수입이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감내하는 일이었다. 노동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자기착취를 낳는다. 일이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므로. 아이를 실컷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힘겹게 흘려보낸 초보 엄마 시절을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방을 정리하다가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육아의 고충과 죄책감,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 뒤섞인 이야기들 속에서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만 믿어!” 세 돌 무렵의 아이가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아이가 내 말을 따라주지 않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 번만 엄마를 믿어봐. 엄마 믿고 해 봐.” 그러면 아이는 언제나 “나는 나만 믿어!”라고 대꾸하며 내 뜻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서는 말괄량이처럼 웃었다. 자기의지가 충만한 아이의 모습이 얄밉고 귀여운 한편, 내심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일기장 한편에 그 말을 큼지막하게 적어두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시절 나의 미래를 가장 의심하던 사람은 사실 나였다.
요즘 나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매일 아침 아이를 유치원 셔틀버스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 녹차를 한 잔 마신다. 소란이 사라진 집의 고요함을 잠시 즐기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청탁받은 원고를 쓰거나,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조사한다. 여전히 일을 하지만 하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육아와 나의 생활을 일보다 우선순위에 올려두었다는 점이다. 나는 일하는 내가 좋지만 돌봄을 하는 나도 좋다. 현실을 충만하게 살면서 나에게 맞는 속도로 일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가족의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제와 달라진 아이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공백을 유지하는 선에서 조금씩 성취하는 삶을 살고 싶다. 세상의 속도보다 너무 느려서 멈춘 것처럼 보여도 유유히 움직이며 그렇게.
호명되지 않는 기쁨
정다연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나는 호명되지 않은 채 길을 걸어 아무도 지금 내가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어떤 구름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이름인지 알 수 없지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서로를 멈춰 세우지 않고도 그대로 스쳐 지나갈 수 있어 발자국 무늬를 가만히 바라봐줄 수 있어 섣불리 부를 수 없다는 거, 뒷모습을 함부로 명명할 수 없다는 거, 버벅거리고, 실패한다는 거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조용히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밤이야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를 봐 무한히 확장된 설원, 가능성, 이런 말은 식상해 쓰이면서 가능성은 실현되고,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확장되지 나는 다만 백지를 바라봐 그게 원래 백지였던 것처럼 백지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는 세계의 호출을 전부 멈추고 이름 없이 분류되지 않은 채 여기, 흘러가는 구름으로 머물고 있어 서류 더미에 새장에 누군가의 서랍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는 바람으로 있어 지금 너의 두 뺨을 가볍게 스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