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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귀재

by 성소영


나는 비즈니스에 젬병인 사람이지만 마케팅 서적은 이따금 읽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광고 카피 하나 바꿨을 뿐인데 재고로 쌓여있던 물건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스토리텔링으로 동네의 작은 가게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언어를 개발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스티브 잡스가 존 스컬리를 애플의 CEO로 영입했던 일화다. 비즈니스 업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는데 나는 몇 년 전 책을 읽고 알게 됐다. 1938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더 큰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경영과 마케팅 전반에서 뛰어난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초고속 승진으로 40대 초반에 펩시콜라의 CEO가 된 존 스컬리였다. 잡스는 스컬리를 찾아가 애플의 CEO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스컬리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펩시는 안정적인 대기업이었으나, 애플은 미래가 불투명한 IT기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가 회심의 말을 던졌다.


“평생 설탕물이나 팔 건가요,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꿀 건가요?” 이 한 마디에 감응한 존 스컬리는 그날 이후 10년간 애플의 CEO를 맡았다고 한다.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 생각했다. ‘음…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바로 일곱 살 딸아이의 어록들과 꼭 닮아있는 말이었다. 스티브 잡스 뺨치는 아이의 설득력은 놀이를 할 때 특히 돋보인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사장을 맡고 아이는 케이크 가게의 사장이 되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갈색 레고를 쌓아 올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만들자 아이는 핑크색 레고를 가지고 딸기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때 손님 역할을 맡은 배우자가 거실을 지나갔다. 나는 손님을 빼앗길새라 배우자의 팔을 붙잡고 잽싸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세요. 프랑스에서 수입한 초콜릿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에요.” “얼마인가요?” “네 천원입니다.” 그 순간 아이가 레고 케이크를 들고 슬며시 다가왔다.


“손님! 아이스크림말고 케이크 사세요. 딸기 케이크 진짜 맛있거든요.”


“아… 저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데.”


“그래요? 그저 그런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드실 건가요? 아니면 진짜 맛있는 딸기케이크를 드실 건가요? 우리 가게는 진짜 맛있는 것만 팔거든요.”


아이의 말에 웃음이 터진 배우자는 아무리 천 원이라도 그저 그런 음식을 돈 주고 사먹기는 아깝다며 진짜 맛있는 딸기 케이크에 장난감 돈 만 원을 지불했다. 와 이런 걸 마케팅 용어로 프레임(frame)이라고 하던가? 눈 뜨고 코 베인 겪으로 손님을 빼앗긴 게 황당하면서도 웃겼다.


이런 설득에 넘어간 것은 한 두 번의 일이 아니다. 역할놀이를 할 때도 아이는 자기가 좋은 역할을 맡으려고 꾀를 부린다. “나는 인어공주 할 거야. 엄마는 인어공주 첫째언니 해.” 물론 나 또한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는다. 외동인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놀 때도 인기 많은 역할을 독점하겠다며 욕심을 부릴까봐 나는 놀이 중간중간 아이에게 자주 딴지를 건다. 제 속내를 숨김없이 내비쳐도 미움받지 않을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갈등을 부딪히고 해결하는 연습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싫어. 나도 인어공주 할 거야. 왜 너만 인어공주해?” 여느 때처럼 잔뜩 심통이 난 척 하자 아이가 슬슬 시동을 걸었다.


“엄마, 인어공주는 안 예쁘고 친구가 하나도 없어.”


“난 예쁜 거 하나도 안 중요해. 인어공주 할 거야. 꼭 예뻐야만 공주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래? 인어공주는 나중에 목소리도 빼앗기고 외로워지는데… 막 물거품이 돼서 사라져버려. 근데 첫째 언니는 엄청 인기가 많거든. 엄마 외로운 거랑 물에 빠지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도 인어공주 하고 싶어?”


말하자면 이런식으로 나는 늘 주인공 역할을 빼앗긴다. 이 능력은 아픈 날에도 예외가 없다. 독감에 걸려 고열이 나는 통에 낮잠을 재우려고 했더니, 잠드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싫어 안 자! 아침에 일어났더니 39.5도였는데 안 자고 놀았더니 37도가 됐어. 자면 더 아파져서 안 돼.”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의 논리. 아침에는 해열제를 안 먹었고, 놀기 전에는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쏙 빼고 본인에게 유리한 것만 이야기한다. 그러다가도 밤잠을 자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런다.


“엄마가 옛날 이야기 하면서 토닥토닥 해주면 열이 내려가던데… 아까처럼 또 하면서 재워줄 수 있어?”


비단 우리 애만 그런 건 아니고, 설득은 모든 어린이의 재능인 것 같다. 문득 몇 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네 살 무렵의 아이에게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뒤 친구들과 모여서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혼자서는 육아가 너무 힘들어 인근에 사는 육아 동지들에게 깊이 의지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고물고물 모여 오후를 함께 보내다가 해가 지면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 미역줄기처럼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는데 그날은 어쩐지 몸이 좋지 않아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려고 아이를 재촉하던 참이었다. “이제 어두워지려고 한다. 우리도 집에 가야 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래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모,. 햇님이 우리랑 헤어지기 싫대요.”


“해가 느릿느릿 움직여요.”


“우리가 가면 햇님이 슬퍼해요!”


친구와 조금 더 놀고 싶어서 단숨에 우주를 제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네 살배기들의 사랑스러운 요청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결국 그날도 우리는 새까만 밤이 되어서야 진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책 <설득의 심리학>에 따르면 설득을 잘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호감을 사야하고, 호감의 원천 중 하나는 바로 신체적 매력이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은 정말 타고난 설득의 귀재다. 너무 너무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깜찍한 말솜씨까지 겸비했으니 팍팍한 어른인 내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요리조리 꾀를 쓰는 아이를 보면 귀엽고도 갸륵해서 모른 척 그 꼬임에 홀딱 넘어가주고 싶다. 제 설득이 먹히면 아이는 ‘해냈다’고 말하는 듯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에서 내 어린시절이 겹쳐보이기도 한다. 어린 나에게도 취향과 기호가 있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말을 따라야만 하는 순간이 참 많았으니까 말이다. 어린이가 제 뜻을 밀고 나가려면 머리를 쓸 수밖에 없다. 역시 재능은 결핍에서 자라는 것인가 보다.


그러니까 아이는 늘 나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입장이고, 어른인 나는 그 말에 설득당한 척 하며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그 옛날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다 알면서도 한 번쯤 눈 감아주고, 더 커다랗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가 아이를 품어준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저녁을 먹다가 그게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나는 굴비의 가시를 발라서 아이의 밥 위에 쏙쏙 얹어주고 있었다. 꿀떡꿀떡 받아 먹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내 밥이 식어가는 것도 잊은 참이었다. 그렇게 연거푸 서너 숟갈을 먹였을 즈음, 아이가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엄마 내가 가시 발라줄게. 엄마도 먹어!” “아니야 괜찮아. 가시 목에 걸리면 안 되니까 엄마가 해줄게. 나는 이따가 먹으면 돼. 너부터 얼른 먹어.” 그러자 아이가 젓가락을 뺏어드는 게 아닌가. “엄마! 이제 생선 가시는 내가 발라서 줄 거야.” 왜 자꾸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나 싶어서 혼을 내려던 찰나에 아이가 말했다.


“앞으로 생선 가시는 내가 발라야 할 것 같아. 우리 집에서 내가 눈이 제일 좋잖아. 빨리 엄마도 먹어!”


며칠 전 영유아검진에서 시력 검사를 한 아이에게 엄마는 컴퓨터로 일하느라 눈이 안 좋은데, 너는 눈이 좋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던 터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막만한 손으로 아이가 서툴게 발라준 굴비의 살을 입에 넣었다. 그건 정말 거절하기 어려운 논리를 가진 설득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덜 발라진 가시가 입천장을 따갑게 찌르는데 왠지 뱉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튼 아이의 사랑은 너무 커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 있는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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