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지 Feb 06. 2017

제멋대로 쓰기

그림책 에세이 #5





올해로 15년째. 편집자로 일을 하다보면, 남의 글을 고치는 일은 점점 더 익숙해지고 내 글을 쓰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텅 빈 백면을 노려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완벽한 문장. 주술이 잘 맞고, 읽기 쉬우면서, 누가 읽어도 흠을 잡기 힘든. 그런 문장들로 백면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 그러다보면 개성적 문체 같은 것은 멀리 가버리고 만다. 한동안 일기조차 쓰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부끄럽게 보였다. 그래서 '보도자료' 같은 걸 쓰느라 번번이 밤을 새곤 했다.

그림책 편지를 쓰면서, 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나는 내 생각의 흐름에 따라 아무렇게나 글을 쓰는 데 다시 익숙해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편집 일을 하고 있고 출판을 위한 글도 쓰고는 있지만, 조금은 용기를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내 글을 비판할 누군가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인 나를 더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이런 글을 써야겠다' 하고 머릿속으로는 그려져도, 막상 자판을 두드리다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이 문장을 쓰고 마지막엔 이런 문장을 써야지, 하고 신이 나서 쓰고 나서 보면 '생각보다 별로네' 하고 지워버릴 때도 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게 재미있다.


나는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편인데, 그 대상이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일 때도 있고 음악일 때도 있고, 한 인간 혹은 사물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려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만 된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나요? 약을 먹어야 할까요?" 의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될 정도로.

구둣바닥에 붙은 껌을 떼듯 꾸역꾸역, 생각을 내가 애정하는 그 대상에서 떼어내어 내 마음으로 다시 가져와 너덜너덜하게라도 붙이고 나서야 이렇게 문장이라는 것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쓰고 나면 반드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최근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자주 쓰지는 못하고, SNS에 짧은 글을 한마디씩 올리는 일엔 더더욱 서투르다. 글쓰기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쉽게 자주 쓰는 건 내가 잘할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은 아닌 셈이다. 그림책 편지도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쓸 때마다 쉽지 않다. 한번에 쭉 써버릴 때도 있지만, 조금씩 생각을 이어붙여 한 달 내내 쓰게 될 때도 있다. (실은 이 글도 몇 달에 걸쳐 쓰고 있다.) 이번 주제는 진짜 어려워, 이걸 왜 시작했지, 난 멍청이인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재미있다. 어렵지만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 계속 쓰고 있다. 제멋대로 쓰고 있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고 있는지 귀찮게 여기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내가 쓴 그림책 두 권이 나온다. 첫 책은 아니지만, 그림책으로서는 첫 책과 두번째 책이기 때문에 책이 어떻게 나올까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세상에서 제일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도 없지만 그래도 내 책이 조용히 묻힌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냥 내 글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의 길이와 이야기의 구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참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좋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내 안에 이렇게 강렬한 욕망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어. 
바다에는 고래들이 가득했지.
고래들은 작은 산들만큼 크고,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처럼 평화로워 보였어.
고래들은 네가 마음에 그려 볼 수 있는 동물들 중에 가장 멋지고 놀라운 동물일 거야.
나는 방파제 끝에 앉아서 고래들에게 귀를 기울이곤 했단다.
때때로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때도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먼 데서 고래들이 몰려오는 거야.
가까이 다가온 고래들은 춤을 추듯 물속에서 헤엄을 쳤지."

"할머니, 어떻게 고래들이 할머니가 거기 계신 것을 알았을까요?"

"고래들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주면 고래들이 찾아와.
성한 조개 껍데기나 예쁜 돌멩이 같은 것을 말이야.
고래들이 널 좋아하게 되면 네가 주는 선물을 받을 거고, 고래들도 너에게 멋진 선물을 줄 거야."

"할머니, 고래들은 할머니한테 무엇을 주었죠? 할머니는 고래들한테서 무슨 선물을 받았어요?"

"나는 한두 번쯤 고래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단다."


할머니에게 고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릴리는 바닷가로 내려가 텅 빈 바다에 노란 꽃을 던지고 고래를 기다렸어요.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뉘엿뉘엿 황혼이 깃들 무렵, 할아버지가 언덕을 내려와 릴리에게 다가왔어요.

"이런 바보 짓을 그만할 수 없니? 네가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 멍청히 앉아 있는 꼴을 봐줄 수가 없구나."



할아버지는 릴리에게 바보 짓을 그만하라고, 멍청히 앉아 있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고 했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날 밤, 릴리가 던진 꽃 주변에서 고래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춤을 췄는지. 릴리가 들었던 고래들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있던 릴리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는지를. 

내가 쓰는 글이, 내가 하는 일이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투성이다. 혼자 작업실에 박혀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짜고, 이런저런 공상에 잠겨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고, 우리의 일을 기억해주고 우리가 만들어낸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어린 시절, 고래를 만났던 걸까? 고래들에게 노란 꽃을 던져주고 그 보답으로 아름다운 그들의 노래를 들었던 것일까? 그래서 어른들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쓸데없는 것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걸까? 

확실한 건 우리는 조금 미쳐 있는 사람들이자 바보 같은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바보 같은 마음이 세상에 아름다운 물결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라라랜드>를 보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뒤로도 계속 뭉클하다. 그래, 우리는 멍청이들이고 미쳐 있지만 그게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지.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누리게 되어 새삼 기쁜 밤이다.


https://youtu.be/mwjalGJo7vA?list=PLOocesvAnCHjWemffFqKehFihwMDjVRpm


She told me:
A bit of madness is key
to give us new colors to see
Who knows where
it will lead us?

And that's why they need us,
So bring on the rebels
the ripples from pebbles
The painters, and poets
and plays

And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Crazy, as they may seem
Here's to the hearts that break
Here's to the mess we make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조금 미쳐 있어야 해

새로운 색을 보여주려면

그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어?


그게 바로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야.

반항을 일으켜

조약돌이 물결을 만들어내듯이

화가와 시인

그리고 연극


꿈꾸는 바보들을 위해

사람들은 미쳤다 여길지 모르지만

가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일으키는 문제들을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책을 함께 읽은 어느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