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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 Dec 27. 2016

고향은 어디인가요

<여우난골족>


어제 내가 고향에 대해 말했을 때 네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몇 년은 되었을 텐데 내가 고향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 "참 이상한 일이다, 특별히 비밀도 아니었는데"라고 했더니, 너는 "아니야, 내가 언니 고향은 당연히 서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했지. 그러곤 우린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업무와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더라. 고향이라는 게 과연 뭘까, 하는 생각 때문에. 

사전을 찾아보면 고향이라는 단어에는 이런 뜻이 있어.


"태어나서 자란 곳."


그런데 이런 뜻도 함께 있더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문득, 너에게 우리 외갓집 얘기를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은 지금도 우리 엄마와 아빠가 살고 있는,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아파트라기보다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사시던 외갓집인 것 같았거든.

외할머니는 아흔 살을 몇 해 앞두고 돌아가셨는데, 태어난 집에서 쭉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바로 옆동네 총각이랑 결혼을 했대.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평생을, 나의 외갓집 동네와 그 옆동네에서 보냈던 셈이지.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집과 그 동네에서 보내셨고. 두 분은 이사라는 걸 가본 적이 없으셨던 것 같아. 인생의 많은 시간을 외갓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같이 보냈던 거야. 부모님을 모시고,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소와 닭과 강아지를 키워낸 곳. 그렇게 북적거리던 곳에서 자식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고 부모님도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 외할아버지도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어. 그 죽음 역시 평생을 보낸 집에서 맞으셨지. 외갓집에는 외할머니는 혼자 남았어. 집은 여러 번 수리를 했지만 낡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서, 혼자 계시는 외할머니가 걱정되어 엄마도 외삼촌도 이모도 외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가려고 했어. 하지만 외할머니는 외딴 도시에 왔다가도 며칠만 지나면 전전긍긍하시더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집이 그립다고.

80년을 한곳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어. 태어난 곳, 유치원을 다닌 곳,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 대학을 다닌 곳이 모두 다른 데다가, 결혼하고 나서 네 번의 이사를 하고 얼마 전 다섯 번째로 이사를 한 나로서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고향.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는 평생 살았던 그곳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고향이었겠지? 그런 든든한 마음으로 살았을 두 분이 그리워.



<여우난골족>(백석 시, 홍성찬 풀어 쓰고 그림, 창비)




명절날 나는 어머니 아버지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큰집으로 가면




고모 작은아버지 작은 어머니 사촌누나 사촌동생들이 그득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안방에들 모이면
방 안에서는 새 옷 내음새가 나고




인절미, 송기떡 콩고물 찰떡 내음새도 나고





쥐잡이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이,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이를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떠들썩하게 논다
아랫못 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꼭 여우난골족 아이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놀고 또 놀았어.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들과 어울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아. 커다란 아궁이에 감자랑 고구마를 넣어 놓고 놀이에 빠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느새 다 익은 감자 고구마를 외할아버지가 가져다주셨어. 외갓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단단하게 얼어 그 위에서 얼음을 타며 놀다가 얕은 얼음을 잘못 밟아 차가운 물에 반쯤 빠지기도 했지. 연못에 빠져서 빨갛게 얼어버린 발 때문에 울고 있으면 어른들이 야단을 치면서도 돌아가며 따순 손으로 내 발을 주물러주셨어.

연못 옆으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매일 지나다니는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작은 자두밭이 나와. 초여름이면, 우리는 다 같이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산딸기를 따고, 꽃을 꺾고, 뱀이 나온다며 소리를 쳤어. 우리끼리만 아는 놀이를 만들고, 규칙을 정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거리다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그래서 아이들이 자는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도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그야말로 "히드득거리다" 하나둘씩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나.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맛있는 음식 냄새에 잠이 깨고

<여우난골족>은 등장하는 풍경도 옷차림도 음식도 나의 외갓집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시절 마음만은 정말 똑같다고 느껴져.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면 "그립다"는 말이 저절로 나와.

이제 이런 풍경은 보기 어려운 것이겠지? 앞으로는 더욱더. 이렇게 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이렇게 마음껏 며칠을 놀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으니까. 게다가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마음껏 노는 아이들 너머로 보이는 많은 음식과 이부자리들을 보며 "저 많은 음식은 누가 다 하고, 저 많은 이불 빨래는 누가 다 할까" 하는 생각에 아찔해지기까지 해. 우리 그런 얘기 자주 했잖아. 명절 음식 진짜 싫다고.  

이 그림책의 편집 과정에 조금 참여했던 덕분에, 나는 이 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를 다른 이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어. 시 <여우난골족>은 백석의 고향 평안북도 정주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시절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그림으로 잘 구현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은 연변 산골 마을에서 설 명절을 보내기까지 했어. 이 시가 쥐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이제는 갈 수 없고, 그곳 그 시절의 정서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친척들은 외갓집을 팔기로 했어. 그 시골에서 외갓집을 관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외갓집은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헐리거나 다른 식으로 개조가 될지도 모르겠어. 커다란 연못 옆으로 난 작은 길도, 엄마가 가끔 데려갔던 오래된 우물도, 자두밭도, 외갓집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도,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 백석의 고향도 나의 외갓집도 또 다른 이들의 고향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참 쓸쓸해져.


왜 그동안은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다음에는 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너에게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에 대해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까만 고양이의 집사이자 나의 동료인 J에게

최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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