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중세 고건축들 사이에서 누렸던 만원의 행복
2019-2020년 겨울방학 9-10주
체코어 연수도 하고, 여행도 좀 하러,
체코에 가면서,
내 옛 크로아티아어 선생님 밀비야에게 연락해서
혹시 연말에 슬로바키아 가냐고 물어봤다.
남편이 슬로바키아인인 밀비야의 가족이
여름방학 때 슬로바키아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예전에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마침 그 겨울에
체코에서 가까운,
그리고 체코와 언어적, 역사적 연관성도 강한
슬로바키아도 한 번 가 볼 생각이었다.
체코어 연수에 몰입해서 거의 매일 수업 들으며
거의 프라하에만 머물렀던 2012년 겨울과 달리,
2019-2020년 겨울엔
체코어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만 듣고,
여행에 좀 더 방점을 찍어
다른 체코 도시와 슬로바키아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혹시 밀비야 가족이 겨울에 슬로바키아를 간다면,
나도 그 시간에 맞춰 슬로바키아 가서
낯선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답장에서 밀비야는
겨울에 슬로바키아 갈 일 없다고 아쉬워하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더러 체코 체류 중간에
그냥 자그레브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내 체코 체류 중반쯤
좋은 정보가 생각난 듯 문득 연락해서는
프라하 근교에 쿠트나호라 괜찮더라며
한 번 거기 가보라고 추천해 줬다.
그런데 나는 2012년 겨울 프라하에서
5-6주 체류할 때
이미 쿠트나호라를 다녀왔었다.
당시에 나는 론리플래닛 “프라하”
한국어 번역 최신판을 사가지고 가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녔는데,
내가 정말 잘 샀다고 뿌듯해했던 그 책에는
박물관, 맛집, 숙소, 교통 등
실용적이지만 일차적이고 가변적인 정보뿐 아니라,
(사실 요금, 시간 등은 책과 다른 경우도 있었다.)
체코 및 프라하 역사와 문화, 현지인의 뒷얘기 같은
한국인이 여행할 때 흔히 무시하는,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심층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내가 유럽 건축의 다양한 양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책의 설명을 읽으면서부터였는데,
알고 보면 유럽의 건축양식은
그 건축뿐 아니라 그 도시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또 좋았던 게
책 뒷부분에 보너스처럼
프라하 인근에 가볼 만한 도시 몇 군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덧붙어 있던 것이었다.
그 책에 나열된 프라하 주변 도시 중에
후배랑 같이 갈 생각이던 체스키크룸로프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 1번,
설명을 보니 왕년에 꽤 잘 나갔던 것 같은
쿠트나호라가 2번이었는데,
1월 말 모스크바 유학 중에 체코 놀러 온 후배랑
체스키크룸로프와 독일 드레스덴 다녀온 후,
2월에 혼자 쿠트나호라를 당일치기로 방문했었다.
그렇게 2012년에 벌써 한 번 다녀왔지만,
밀비야의 추천이 아니었어도,
난 2020년에도 쿠트나호라를
한 번 더 가볼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쿠트나호라는 프라하에서 가까워서 부담이 적고,
중세적 고풍스러움이 잘 보전되어 있고,
갈 데, 볼 데가 생각보다 많고,
그런데도 관광객이 붐비지 않고,
치밀한 사전계획 같은 거 세우지 않아도,
통합 티켓 하나면 주요 명소를 다 커버했고,
당시 만원 정도면 주요 관광지 입장이 가능했어서
가성비도 뛰어나,
기대 이상으로 괜찮을 뿐 아니라,
2012년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뭔가 나만 아는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2020년 겨울엔
안 가본 다른 체코 도시들 가느라,
쿠트나호라를 다시 갈 시간까지는 안 나서
결국 두 번은 못 갔다.
2019-2020년 겨울에 체코 갈 때도
그 “오래된” 론리플래닛을 들고 갔고,
2012년에 미처 못 갔던 추천 도시 중에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는,
테레진, 리토메르지체, 카를슈테인에도 다녀왔는데
https://brunch.co.kr/@saddjw/154
그중에서 나에게는
2012년에 다녀온 쿠트나호라가 최고였다.
그래서 왜 밀비야가 갑자기 나에게 연락해서
쿠트나호라를 추천해 줬는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처음 쿠트나호라(Kutná Hora)라는 지명을
론리플래닛에서 봤을 때,
“쿠트나”는 몰라도
“호라(Hora)”가 “산”인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직접 가보니 "산"은 안 보이고,
"언덕"은 좀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쿠트나호라”의 “호라”가
"높은 곳"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쿠트나(Kutná)"는 형용사형인데,
체코어 사전에 안 나오는 말이고,
이 어원에 대해선
독일어 기원설과 체코어 기원설
이렇게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쿠트나호라의 역사는
현재에도 매우 중요한 관광지인
세들레츠 수도원(Sedlecký klášter, Sedlec Abbey)이
12C에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직접통치 수도원이어서,
독일의 수도사들이 와 있었다.
그 수도사들이 입는 "가톨릭 법복"을 의미하는
독일어 명사 Kutten
또는
'-을 파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동사 kutten에서
체코어 형용사 “쿠트나(Kutná)"가 나왔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어원 가설이다.
독일어로 “쿠트나호라”는
쿠텐베르크(Kuttenberg)라고 불리는데,
berg는 ‘산’이고,
kutten은 명사, 동사로 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두 번째 어원 가설은
'-을 파다'라는 의미의 체코어 동사 kutati에서
형용사 “쿠트나(Kutná)"가 나왔다는 것인데,
현대 체코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동사고,
다른 슬라브어에서도 못 본 형태라,
내 생각엔 이 체코어 단어도
독일어 kutten에서 온 것 같다.
아무튼
독일어, 체코어의 '-을 파다'에서
이 도시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이유는
13C부터 이곳에서
독일인 광부들이 은을 채취했기 때문이다.
이 은 광산(silver mine) 덕에 쿠트나호라는
13-16C 수백 년 간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당시에는 프라하에 이어
체코 전신인 보헤미아의 제2 도시가 되었다.
이에 많은 보헤미아 왕들이
이곳을 거처로 삼아 머물기도 했고,
현재 남은 건축들의 규모와 웅장함을 봐도
당시 쿠트라호라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15C 체코 신교도인 후스교도(Hussite)와
가톨릭 구교도가 벌인 전쟁 중에
후스교도들의 영웅 얀 지쥬카(Jan Žižka)가
신성로마제국의 연합 군대들을 제압한 후
쿠트나호라를 함락하고 지배하기도 했다.
얀 지쥬카의 이 승리는
게르만족이 주축이 된 강대국 타민족을
체코인이 군사적으로 처음 압도한 경험이라,
체코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참고로 거대한 얀 지쥬카의 동상이
프라하 지쥬코프(Žižkov) 언덕 위에 서 있고,
여기 탁 트인 전망이 정말 좋다.
하지만 16C 쿠트나호라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후,
홍수, 역병, 30년 전쟁, 화재 등을 겪으면서
도시는 피폐해지고,
경제적으로 쇠퇴했고,
18C엔 은 광산도 폐광되었다.
그렇게 경제발전의 원천과 건축의 재원이 사라졌고,
그래서 쿠트나호라의 주요 유적은
거의 다 18C 이전 건축이다.
하지만 오래된 고딕 양식이 크게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보전되게 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체코, 슬로바키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트나호라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고,
1993년 체코의 일부가 되었다.
오래된 중세 건축들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1995년엔 쿠트나호라 구시가와 세들레츠 지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쿠트라호라는 프라하로부터 동쪽으로
7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니,
진짜 찐근교다.
(한국인들이 흔히 “프라하 근교”라고 표현하는
체스키크룸로프는 시외버스로 2-3시간 걸린다.)
쿠트나호라가 얼마나 가까운지
프라하에서 시내버스를 타고도 갈 수 있다.
프라하 지하철 C 호선 종점 Háje역에서
381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40 정거장 정도 지나고,
약 2시간 소요된단다.
비용은 약 3유로.
쿠트나호라 중심부 구시가가 종점이다.
(프라하 Háje 지하철 역 지도상 위치)
한편, 프라하-쿠트나호라 간
기차로는 50분이 소요되고,
2023년 2월 현재 편도 140코루나(약 8천원)다.
기차를 타고 가면
쿠트나호라 중앙역(Kutná Hora hl.n.)에서
중심부 구시가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뭐 20분이면
가뿐히 걸을만한 거리인 데다가,
중앙역과 구시가 사이에도
중요 관광지가 있기 때문에,
중앙역에서 걸어가는 게 어떤 면에선 더 낫다.
그래서 보통 프라하에서 쿠트라호라까지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 같고,
론리플래닛에도 그렇게 써 있길래
나도 기차를 타고갔다.
2012년 당시에는
체코어로 어떻게 말할 지 여러 번 혼자 연습하고
(물론 영어로 말해도 되는데,
체코어 배우던 중이어서 체코어로 하고 싶었다)
프라하 중앙역 매표소에 가서
기차티켓을 대면으로 예매했는데,
왕복 티켓이어도
돌아오는 시간은 따로 정해지지 않은
일종의 열린 티켓이어서,
프라하 중앙역에 비치된,
접는 코팅지에 적힌 작은 쿠트나호라 기차시간표를
따로 챙겨 나왔다.
물론 지금도 프라하 중앙역에 직접 가서
종이 티켓을 발매받는 것이 가능한데,
2020년 다른 체코 도시로 기차 여행할 땐
온라인에서 비대면 예매가 가능해졌고,
그냥 PDF 형태의 E-ticket 보여주면
검표원이 QR코드 찍어서 확인했다.
아마 이젠 쿠트나호라도 이렇게 갈 수 있을 거다.
(체코 기차표 예매법은 다음 포스트 참고)
2012년 당시 찍어 둔 사진을 보니,
아마 10시 5분 출발 브르노(Brno) 행
기차를 타고 갔나 보다.
그렇게 50분 후에 도착한
쿠트라호라 중앙역의 표지판이
왜 이렇게 귀엽게 괴기스러운지
론리플래닛에서 설명을 읽어 알고 있긴 했지만,
이때는 아직 실물이 어떨지 짐작도 잘 안 되었다.
기찻길 너머 멀리 예쁜 집들이 보이길래,
저긴가 싶어 사진을 찍었는데,
저기 말고 좀 더 많이 걸어가야
조금 더 웅장하고 디테일이 섬세하고 세련된
본격적인 “관광지”가 보인다.
아래 지도 오른쪽 끝 3번이
쿠트나호라 중앙기차역이고,
왼쪽 끝 살구색 동네가 구시가다.
지도에 내가 임의로 붙인 번호는
이 포스트의 소제목 번호인데,
중앙기차역 왼쪽 4, 5번 관광지부터
왼쪽 끝 구시가로 이동하면서
쿠트나호라를 둘러보겠다.
쿠트나호라 기차역에서 구시가 쪽으로 걸어가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관광지이자,
가장 '쿠트나호라'적인 대표 랜드마크이며
관광객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세들레츠 납골 성당(Kostnice v Sedlci, Sedlec Ossuary)이다.
세들레츠(Sedlec)는 쿠트나호라의 역사가 시작된
동쪽 지역 이름으로,
뭐 서울로 치면 강동 정도 되겠다.
13C 초 예루살렘으로 파견된
세들레츠 수도원(Sedlecký klášter, Sedlec Abbey)의 수도사가
골고다에서 가져온 흙을 수도원 묘지 위에 뿌리면서
세들레츠 수도원 묘지는
중부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신성한 땅"이 되었고,
중부유럽 주민들이 가장 선망하는 매장지가 되었다.
이후 14C 흑사병,
15C 후스 전쟁(Hussite Wars)의 사망자들로
장지가 많이 필요해지자 묘지는 확장되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딕양식의 납골 성당도 이 즈음 건설되었다.
18C 후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수도원을 해체하고,
세속적 권력, 즉 체코-독일 귀족인
슈바르첸버그(Schwarzenberg)에게
성당이 넘어갔다.
그리고 19C 이 체코-독일 귀족 가문에서
보헤미아 목수
프란티세크 린트(František Rint)에게
바로크식 해골 인테리어를 맡겼다.
아마도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모토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실제 인간의 뼈로 만든 인테리어와
그의 이름이 아직까지 이 성당 안에 남아 있다.
근데 성당에 빛이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해골과 인간 뼈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데도
성당은 으스스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좀 특이하다, 괴이하다 뭐 그런 느낌,
별로 안 무서운 좀비 영화 같은 느낌이다.
성당 입구에는 역시나 사람 뼈로
1870년 체스카 스칼리체(Česká Skalice)에서 온 F. 린트(Rint)
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2023년 2월 현재 입장료는
일반 160코루나(약 9천원),
할인 120코루나, 50코루나.
개관 시간은 시즌마다 다르다.
해골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고딕 건축이자,
또 다른 유네스코 문화유산
성모승천 성 세례요한 성당(Kostel Nanebevzetí Panny Marie a svatého Jana Křtitele, Church of the Assumption of Our Lady and Saint John the Baptist)이 보인다.
역시나 과거에 세들레츠 수도원의 일부였다.
세들레츠 수도원은 단식, 기도, 노동을 중시한
시토회(Cistercians) 수도원이었고,
쿠트나호라 역사의 시작이었다.
성모승천성당은 원래 대성당(Cathedral)으로
13-14C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다가
15C 신교도 후스교도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이후 18C초 재건되면서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
비교적 납작한 천장과 전면 장식, 나선형 계단 등이
그때 변화된 부분이란다.
내부의 레몬색과 입구 천장의 그림도
바로크스럽다.
성당의 위층으로도 올라갈 수 있는데,
2층에 바라본 모습도 근사하다.
2012년엔 그냥 인테리어만 본 것 같은데,
현재는 9분짜리 애니메이션도 상영하고
성당의 보물창고(?)도 볼 수 있다고 한다.
2023년 2월 현재 입장료는
일반 160코루나(약 9천원),
할인 120코루나, 50코루나.
개관 시간은 시즌마다 다르다.
세들레츠를 벗어나
이제 가던 길을 10여분 계속 가면
구시가에 도착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구시가에도
오래된 아름다운 볼거리가 많다.
아래 지도에 임의로 붙인 알파벳 순서에 따라 둘러보겠다.
구시가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광장은
팔라츠키 광장(Palackého náměstí)이다.
[위 지도 a]
다른 유럽 도시는 보통 중앙광장 근처에
주요 관광 유적이 몰려있는 것과 달리,
쿠트나호라의 중앙광장은 그냥 현지인의 공간이다.
팔라츠키 광장 북동쪽에 있는
우르술라 수녀원(Klášter řádu svaté Voršily, Church of Saint Ursula's Convent) [지도 b]은
수녀원과 여학교의 용도로
18C에 처음 세워졌고,
19-20C에 둥근 지붕과 곡선의 외벽을 갖춘
현재의 신바로크 건물이 되었다.
쿠트라호라 구시가에선 꽤 현대적 건축이다.
그보다 좀 더 서쪽에 자리 잡은
석조 저택(Kamenný dům, Stone house)
[지도 c]은
14C 후기 고딕 건축으로,
창문과 지붕의 장식이 아름답다.
그 남쪽 성 요한 네포무크 성당(Kostel svatého Jana Nepomuckého, Church of St John of Nepomuk) [지도 d]은
18C 건설된 바로크 성당이다.
요한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끝까지 비밀로 지키다가
강물에 던져져 익사하여 순교한 사제로,
체코 출신 가톨릭 성인이고,
체코와 중부유럽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옆 돌 분수(Kamenná kašna, Stone Fountain) [지도 e]는
은 채굴 산업으로 인해
부족해진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C 만든 고딕 장식 분수로
19C 후반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팔라츠키 광장 남동쪽에 자리 잡은
이탈리아 궁정(Vlašský dvůr, Italian Court)
[지도 f]은
과거 보헤미아 조폐국이었다.
13C 처음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는
어느 중세 유럽 도시에나 있는,
해자(moat)로 둘러싸인
흔한 고딕 성(castle)이었는데,
쿠트나호라에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보헤미아 전체에서 통용되는 은 동전을 찍어내는
조폐국이 되었고,
쿠트나호라에 방문한 보헤미아 왕들이 머무는
왕실 궁전으로도 활용되었다.
18C 은 광산이 폐쇄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청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곳에서 은 동전을 찍어내기 시작하면서
당시 보헤미아 왕국 통화 체계가 재편되었는데,
그 개혁을 주도한 사람이 이탈리아인이어서,
"이탈리아" 궁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궁정 앞에는
1차 세계대전 중 체코 독립운동을 하고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첫 대통령이 된
토마슈 마사리크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밑에는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적혀 있다.
Státy se udržují idejemi, z nichž se zrodily. 국가는 그것을 탄생시킨 사상들에 의해 지탱된다.
그 서쪽의 성 야고보 성당(Kostel svatého Jakuba Staršího, Church of St James)[지도 g]은
14-15C 후기 고딕 성당으로,
쿠트나호라의 모든 성당과
거의 등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쿠트라호라 중심성당이다.
높은 첨탑 때문에 멀리에서도 눈에 띈다.
이건 성 바르바라 성당 근처에서 본 모습이다.
지대 자체가 높아서,
성당 뒤쪽에서는 포도밭과 집들이 내려다보인다.
그 서쪽의 루트하르트 길(Ruthardská ulice)
[지도 h]은 오래된 돌담 옆 돌길이다.
전설에 따르면 부유한 상인 루트하르트가
결혼식 비용과 지참금 때문에 딸을 시집보내기 싫어
높은 담을 쌓고 자기 딸을 가둬두었다.
그의 딸은 결국 사망했고,
혼령이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저택 자체는 17C에 붕괴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돌길과 돌담은
아직도 묵직하게 남아 있다.
작은 성(Hrádek, Little Castle) [지도 i]은
15C 고딕 건축으로
처음엔 이름 그대로 군사적 요새였는데,
나중에는 학교로 사용되기도 했고,
현재는 체코 은 박물관(Museum of Silver)이다.
그 밖의 그냥 평범한 골목을 걷는 것도 좋다.
그럼 이제 구시가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인
지도 7번, 8번 쪽으로 움직여 보겠다.
쿠트나호라 관광의 클라이맥스는
무엇보다도 성 바르바라 성당이었다.
비슷비슷한 고딕성당을 많이 봐서
이제 거대하고 웅장하고 천장 높은 성당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성 바르바라 성당은 차원이 또 달랐다.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장식이 화려해서,
은 광산으로 쌓은 부로
보헤미아 제2도시에까지 올랐던
쿠트라호라의 전성기를
건축적으로 증언하는 것 같다.
성 바르바라 성당(Chrám svaté Barbory, Saint Barbara's Church)은
14C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해서
20C 초에야 완성되었다.
성당 규모가 워낙 클 뿐 아니라,
신교도인 후스교도와의 종교 전쟁과
그후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수백 년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프라하 성의 성 비토 성당도
완성되는 데 수백 년이 걸렸고
프라하 시내의 눈의 성모마리아 성당은
착공 후 수백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미완성이다.
가톨릭 성인 성 바르바라(Saint Barbara)는
광부의 수호신이라,
은 광산으로 유명했던 쿠트나호라에 필요했고,
실제로 이 성당을 건설하는데
광부들이 물심양면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도
성 바르바라 예배당이 있다.
쿠트나호라의 성 바르바르 성당은
고딕 성당답게 성당 내부의 천장이 매우 높고,
길고 높은 창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데,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은 매우 현대적이다.
2023년 현재 입장료는 일반 180코루나(약 만원)
할인 140코루나, 50코루나.
오픈 시간은 시즌에 따라 다르다.
Chrám svaté Barbory (chramsvatebarbory.cz)
세들레츠 성당들과 달리 여전히 미사도 하는데,
미사 시간은 일주일 단위로 공지되는 것 같다.
Bohoslužby a ohlášky – Římskokatolická farnost – arciděkanství Kutná Hora (khfarnost.cz)
성당 밖 남쪽 난간 아래로는
산책로와 포도밭이 있고,
북쪽으로는 난간을 따라 예수회 학교가 서 있다.
예수회 학교(Jezuitská kolej, Jesuit College)는
성 바르바라 성당과 작은 성 사이에
길게 자리 잡고 있다.
17C 중반
예수회 건축 전문가였던 이탈리아인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18C 중반 다른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완성됐다.
예수회 학교 앞 난간의 조각은
12명의 예수회 성인이라고 한다.
18C 예수회는 해체되고,
예수회 학교는
군대 병영으로, 그리고 군 병원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계속 군에서 사용했는데,
1998년부터는 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부 보헤미아 미술관(GASK: Gallery of the Central Bohemian Region)은
20-21C 예술작품으로 특화되어 있는데,
건물 자체가 매우 커서
전시작품 수도 많고,
현대작품이라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작품 자체도 다양하고 발랄해서 좋았다.
역사적 유산인 건물 자체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관람객도 많지 않고,
꽤 늦게까지 문을 열어서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1-2시간 본 것 같다.
이렇게 점자 설명도 있었는데,
2012년 이 미술관에서 처음 본 이런 배려도
너무 맘에 들었다.
그냥 “시골” 미술관이려니 생각했는데,
매우 앞서가는 “현대적” 현대미술관이었던 거다.
그밖에 다른 괜찮은 그림도 많았지만,
난 미술관 전시 그림 사진은 잘 안 찍어서
그 순간에 집중하며 그냥 보기만 했는데,
이 휴식공간은 사진 찍히고 싶어하는 것 같아
예외로 했다.
전시를 보고 미술관을 나오니
벌써 해가 져서 주변이 캄캄했다.
쿠트나호라 여행이 매우 만족스러워서
저녁까지 먹고 좀 더 있다 가려고,
론리플래닛을 펼쳐보니,
"만족한 달팽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길래,
주소 보고 거길 찾아갔는데,
현지인들이 많이 앉아 있는 그 분위기도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다.
그렇게 "흡족한 달팽이"가 되어서
프라하 기차역에서 티켓 예매할 때 집어온
기차 시간표에 맞춰서
쿠트나호라 기차역으로 갔다.
체코에서 기차는 쿠트나호라가 처음이라
혹시 내가 기차시간표를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싶어,
주인아주머니에게
내가 이해한 시간이 맞는지 확인도 했다.
시간에 맞춰 간다고 갔는데,
내가 구시가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느라 늦었는지,
아님 시간 계산을 잘 못했는지,
아님 기차가 빨리 왔는지,
거의 1-2분 차이로 타려던 기차를 놓쳤다.
기차역으로 기차가 다가오는 게 보여서
그 겨울에 몸에서 땀이 나게 뛰었는데도
역부족이었다.
눈앞에서 아깝게 기차를 놓치고 나서
처음엔 넋이 빠져 있었는데,
다행히 1시간쯤 후에 오는 다른 기차가 있었고,
대합실은 따뜻한 편이어서,
거기서 그걸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내가 아까 그 기차를 탔으면,
집에 1시간 일찍 가서 뭘 했을까 하는 생각했다.
아마도 뭐 오늘 여행하며 찍은 사진 보고,
체코어 공부하겠네 싶었다.
그래서 한적한 대합실에 앉아서
그냥 그걸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차 아깝게 놓친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순간의 관점이 아니라,
다른 시간과의 연속성의 관점으로 보면,
100퍼센트 나쁜 일이란 세상에 없다.
그 별거 아니지만 또 한 편으론 특별한 삽질로
평범하지만 특별한 공간이 되어버린
기차 대합실도 그냥 괜히 한번 둘러봤다.
그때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아마 9시 3분 출발 다음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왔나 보다.
나는 그때 프라하 동쪽에 살았는데,
이 기차가 내가 살던 숙소 창문 밖으로 보이던
그 작은 기차역에 서길래
프라하 중앙역까지 가기 전에
그 동네 기차역에서 내렸다.
쿠트나호라 갈 때도
프라하 중앙역까지 가지 말고
거기서 타면 될 걸 그랬다.
아무튼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30-40분 또 절약했다.
그게 또 신기해서
집에 가서는
그 동네 기차역에서 또 갈 수 있는 근교도시 없나
론리플래닛 뒷부분을 한참 또 뒤졌었다.
2012년 처음 갔을 때
쿠트나호라가 마음에 들었던 여러 이유 중
통합 티켓도 있었다.
쿠트나호라 기차역에서 구시가 쪽으로 걷다가
처음 만난 볼거리였던
납골 성당 앞에 이런 벽보가 붙어 있었다.
185코루나,
즉 단돈 만원에
4개의 주요 관광지에 입장할 수 있는 거다.
쿠트나호라로 떠날 때
나는 론리플래닛의 글만 읽어 보고,
구체적 내용은 스포를 당하기 싫어서,
검색은 따로 안 하고 그냥 갔다.
그래서 대강의 정보만 아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긴 도시인지도
정확하게 뭐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어디 어디를 갈 건지 구체적인 계획 없이,
작고 유명하지 않은 도시니,
그냥 보이는 대로 보면 되겠지 하고 간건데,
그런 준비되지 않은 방문자인 나에게
이 통합 티켓이 어디 가면 된다고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여행 오거나이저를 얻게 된 건데,
통합 티켓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우선 그 4곳을 방문하고,
나머지 부분도 둘러보면 되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하니 딱 좋은 여행이 되었다.
“헐값”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4곳 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도
예상보다 훨씬 좋아,
완전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 검색해 보니,
그 이후로 통합 티켓 가격도 많이 오르고,
혜택도 많이 축소됐다.
내가 찾은 통합티켓 이미지 몇 개만 봐도,
내가 방문한 1년 뒤인
2013년에 이미 요금이 인상되어
1+2+3+4 일반티켓이
280코루나(약 15,000원)가 되었고,
2016년 1+2+3+4 일반티켓이
305코루나(약 17,000원)가 되더니,
2019년엔 4가 빠진 1+2+3가
일반티켓 220코루나(약 13,000원)가 되었고,
2023년 2월 현재는
1+2+3 일반티켓이 320코루나(약 18,000원),
할인 250코루나(약 15,000원)이다.
Římskokatolická farnost Kutná Hora - Sedlec | správce světového dědictví UNESCO
www.sedlec.info
2012년과 비교해서
2019-2020년 체코의 교통비나 생필품 가격은
많이 인상되지 않았는데,
관광지 요금은 2배 가까이 오른 거다.
만원의 행복이 2만 원의 행복이 되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서 이 통합티켓이 비싸냐?
사실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천년 가까이 된,
저 특별하고 웅장한 중세 건축을,
더군다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3군데나 입장하는 가격으론
여전히 그 실물 가치보다 훨씬 저렴한 것 같다.
같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마을이라고 해도,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알록달록 예쁜 체스키크룸로프가
유럽 풍경과 건축을 많이 접하지 않은
아시아인에게 어필한다면,
유럽에서도 흔치 않은
해골 인테리어 성당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래된 중세 고딕 성당이
여러 채나 남아있는,
그리고 그밖에 거의 천년 가까이 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구시가를 채우고 있는,
유럽적이지만 또 특별한 걸 가진,
쿠트나호라는
유럽인에게 더 어필하는 관광지인 것 같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인 밀비야도 추천했는지 모른다.
원래 포장이 그럴싸한 것엔
여행지뿐 아니라 사람이든 물건이든 스토리든
별로 많이 매력을 못 느끼는데다가,
이제 여기저기, 특히 유럽 도시는 많이 다녀봐서,
단지 예쁜 관광지에는 감동을 잘 안 하고,
여행지든 일상의 맛집이든 이벤트든
사람 많은 곳이나 줄 서야 하는 곳은
꺼려하는 나에게도,
방문객을 위해 한껏 꾸민
인공적인 중세 마을 테마파크 같았던
체스키크룸로프보다는
중세 보물들을 품고도
마을이 관광으로 모두 수렴되지 않고,
그냥 자기 나름대로의 일상이 또 있는 듯
치장 안하고 어깨 힘 빼고 그냥 무심하게 서 있지만,
그래도 한때 보헤미아 제2도시였던
그 기품, 그 기개를 숨길 수 없는
자연스러운 중세 마을 쿠트나호라가 더 좋았다.
알고 보면 프라하 말고도
체코에는 예쁜 풍경, 좋은 여행지가 많이 있지만,
프라하에서 가까운 당일치기 여행지로
나에게는 쿠트나호라만 한 데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