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나와 살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사람들과 인종,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이런 성급한 일반화의 데이터가 축적되다 보면 "라떼 꼰대"가 되는 자연스러운 순서를 맞이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산다. 가끔 보면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모를 정도로. 하지만 그 어느 나라 민족보다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런 걸 요새 말로 '종특'이라고 하나...?
나 역시도 참 예외 없이 열심히 살았다. 초, 중학교 때는 열심히 놀기에 바빴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도 제작하고, 쇼핑도 일주일에 다섯 번씩 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 고3이 되었을 때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공부에 전념했으니, 그만큼 열심히 살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대학교 때는? 방송, 연극학회에 들어가 1년에 한 번씩 연극을 올렸고, 장장 8시간이 걸리는 시험을 합격해 '광고 연합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호주와 밴쿠버를 다녀왔고, 복학한 후에는 신문방송+영상정보학과를 복수 전공하면서 패션 디자인까지 부전공을 마쳤다. 그리고 졸업하기 전 대학교 4학년 막 학기에는 취업계를 내고 학교를 다니면서 샤넬에서 일을 했고, 그 사이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신청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밴쿠버에서 패션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쓰니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밴쿠버에 와서는 쉬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역시 한국인의 종특을 발휘하여 패션 마케팅, 비주얼 머천다이징, 스타일링부터 시작해서 소셜미디어 마케팅을 해 왔고, 패션계에서 은퇴하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다시 학교에 들어가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졸업할 시기에 코로나가 터졌지만 바로 프리랜서로 시작하여 밴쿠버에서 유명한 베트남 식당 '안앤치 Anh and Chi'에서 패키징 디자인, 메뉴 및 웹사이트 디자인을 도맡았고, 그 후 광고계에서 아트 디렉션, 프로덕션 디자인을 하는 1인 기업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으면 행복해야 되는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 우울해서 억울할 정도다.
왜 그럴까? 왜 열심히 살아왔는데 허무함만 남는 건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어렸을 때는 목표를 설정한 뒤 달성하는 데서 오는 성취감에 꽤 오래 취해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뭔가 큰 프로젝트를 해내도 감흥이 오래가질 못한다. 그리고 다음 목표가 설정이 안 되어 있으면 정말 정신을 놓게 된다. 구글 캘린더에 일정이 안 잡힌 날이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누워있기 일쑤다. 넷플릭스에 안 본 드라마가 없어 한참을 리모컨 버튼을 하염없이 누르다, 휴대폰으로 넘어가 유튜브를 잠깐 보다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넘어가서 별 관심도 없는 글들을 보는 순서를 반복하며, 그렇게 시간을 낭비한다. 너무 누워있는 나머지 허리가 나갈 것 같지만 머리가 멍하고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뭘 하고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치열하게 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결과가 이렇다니 참 허망하다. 목공, 레이저, 라떼 아트 등 새로운 것들을 계속 시도해보는 요즘이지만 뭔가 계속 엉뚱한 곳에 삽질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몹쓸 놈의 완벽주의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할 때 나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다. 나를 괴롭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상태 유지를 하면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죄책감 없이 쉬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너무나도 힘든 겨울나기를 보내는 요즘.
친한 친구들이 제주도에 간다며 초대를 해왔지만 한국에 가려면 영사관에 격리 면제서를 받기 위해 직계 가족 증명서 및 여러 서류를 떼야하고, PCR 테스트도 여러 번 해야 한다. 캐나다의 PCR 테스트가 세금 포함 거의 250불이니, 한국에서 하는 건 좀 저렴하다고 해도 지금 여행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허나 한국을 갔다 온다고 해서 이런 감정들이 나아질까.
그냥 삶이라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인지. 고통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쓸데없는 존재론적인 생각을 하는 걸 하는 걸 보니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하며 나 자신을 질책하는 되돌이 표 같은 생활의 연속인 요즘. 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에선가 홀로 우울해하고 있을까. 아, 열심히 살아도 우울한 이 인생이여. 젠장. 다음 생에는 머리 복잡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 말고 그냥 도토리만 주워 먹어도 행복한 다람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