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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다른 삶에 대해 배우다

by 웅사이다

배움은 단순히 지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 역사, 철학과 같은 학문은 지식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직접 다른 삶을 체험하게 하진 않는다. 우리는 지식을 넘어서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각자는 자신의 삶을 단 한 번만 살며,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은 종종 어렵다. 중세의 귀족은 노예의 삶을, 노예는 귀족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은 친숙하고 익숙하지만, 타인의 삶은 종종 낯설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고 멈추면 많은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삶을 배울 수 있을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야기는 삶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같은 상황에서 사람마다 어떻게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과 영화는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제공하며, 작가와 감독은 자신의 창조한 세계를 통해 특정한 관점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일상에 파묻힌 어른들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조금씩 내려놓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이것은 예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귀중한 깨달음의 한 형태이다.


알랭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불안]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분명한 점은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서 늘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 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단 한 번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기에, 다른 삶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우리에게 이야기는 비평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야기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삶의 조건들 (죽음, 실패, 슬픔, 고통)을 경험하도록 해서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에서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이야기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욥기


성경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성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욥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며, 욥의 이야기는 구약에 위치해 있다. 욥은 기원전 시대의 인물로, 당시 그는 큰 부와 경건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성공한 기업가이자 남을 돕는 선한 사람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욥기는 그의 성공적인 삶의 단면을 그리기보다는 그 이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이야기에서 신과 악마는 욥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이 대화는 결국 신이 악마에게 욥에게 고난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마무리된다.


고난과 시련을 해석하는 방식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욥은 재산과 가족을 잃고 건강마저 상실한 채 성 밖에서 몸을 긁으며 고통을 호소한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실패를 목격하며, 그 사람 자체를 실패자로 낙인찍기 쉽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해석하며, 현재의 상황이 과거와 개인의 전체적인 가치를 정의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욥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욥과 같이 성공한 사람은 드물고, 그처럼 실패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단면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서사는 주로 욥의 고통과 그의 세 친구와의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려움 속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친구와 논쟁을 벌인 경험이 있는가? 욥기가 아니었다면 접할 수 없었을 한 사람의 고통과 생각을 듣게 된다. 경건한 욥조차 극심한 고통 속에서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욥기를 읽으며 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욥의 배후에서 하나님과 악마가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패하는 사람을 보며 종종 무심하게 그들이 실패할 만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실패는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작은 죽음 중 하나이다. 실패를 대하는 방식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생에서의 실패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가 고통 받고 있을 때 그를 단순히 실패자로 낙인찍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이해할 수 있다. 비난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 나머지 네 손가락은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과거의 즐거웠던 순간들은 잊혀진다. 욥의 이야기는 성공과 실패가 단순히 우리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제공한다. 현재의 일로 인생 전체를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임을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2. 소울


2020년에 개봉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와 삶을 거부하는 자의 만남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붙잡으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탐색한다. 예를 들어, 꿈에 그리던 회사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의 흥분과 기쁨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영화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우며 학생들에게 재즈의 기쁨을 전하려 노력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저명한 재즈 뮤지션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밴드에 참여할 기회를 얻으면서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다. 이 기회는 수많은 가능성을 약속하며 그를 들뜨게 했다. 만약 이러한 중대한 날에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다면 어떨까?


조 가드너는 성공을 눈앞에 두고 맨홀에 빠져 저승으로 가는 길에 서게 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이 머무는 세계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삶을 거부하는 영혼 22호를 만나면서 그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에게 사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만약 인생을 미리 알 수 있다면 22호처럼 삶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 두 영혼의 만남을 지구에서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 연결시킨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포착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성공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마주할 기회가 없으며, 살기 전에 삶을 거부하는 경험도 직접 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성공 직전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삶 자체가 두려운 아이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삶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어제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성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조 가드너와 22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영화는 결국 삶의 목적이나 의미, 달성해야 할 성공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 속 아름다움을 그린다. 조 가드너와 22호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깨닫기 어려웠을 것이다.


욥기와 소울은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욥기가 없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통해 나의 전체 인생을 낙오자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웠을 것이다. 소울이 없었다면, 삶에는 반드시 거창한 의미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만약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가 없고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다면,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유는 다른 이들이 내 인생을 평가하거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할 때, 나를 좀 더 초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매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다양한 삶을 학습하면서, 관용과 공감이라는 값진 덕목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삶의 범위를 넘어서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지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부모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나 영화에 접근한다면, 자식이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과 같이 세대 갈등이 심한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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