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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사이다 Apr 04. 2024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인사한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냐?”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나 서로를 만나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고, 그런 변하지 않는 나를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한 인사지만, 나는 묘하게 마음이 불편하다. 상대방이 불편한 것이 아니고, 나는 이미 많이 변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모습이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사를 주고받을 테지만, 사실 우리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과연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같은 사람일까?


나는 내가 변하길 원하면서도 변하지 않길 바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부분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라는 사람과 상관없는 모습은 변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데, 이런 모습은 나의 핵심적인 부분과 크게 관련이 없다. 갑자기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면, ‘와우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어!’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나 자신이 진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가치관이나 정체성, 자아가 변할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순수함은 변하지 않길 바란다.


때로는 그 바램이 나를 괴롭힌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가치관과 정체성은 실제로는 변하기 때문이다. 나를 나라고 인식하게 해주는 핵심적인 부분이 변해버린다면, 내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하고, 완전하고 불변하는 신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변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생각은 불완전하다. 세상을 경험하면서 몰랐던 세상의 이면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게 된다. 나를 잃는 것보다 더 크게 잃는 게 있을까? 따라서 나의 세계관을 잃지 않으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변한다. 시간에 따라 나라는 존재의 파편들이 흔적처럼 과거로 남는다. 지금 나의 눈에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의 파편들이 눈에 보이게 된다. 자연스레 이 파편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인식을 형성한다. 어릴 때 어떤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과거에는 어떤 것이 기뻤고 현재 어떤 것이 슬프고… 이런 기억들이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게 해 준다.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에 이런 기억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까? 사실 이는 너무나 부족한 정보이다. 나는 앞으로도 변할 것이고, 많은 감정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완성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알 수가 없다.


나는 나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나를 절대 알 수 없다니. 나를 절대 알 수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 창작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사실 많은 창작 혹은 창조적인 행위를 할 때, 어떤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시작을 한다. 하지만 그대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보고 즐기는 창작물 중에 처음 의도대로 만들어진 경우는 많지 않고, 오히려 처음 의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더 훌륭해진 경우가 많다. 마치, 인도를 찾으려 떠났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같달까. 콜럼버스는 아마 죽을 대까지 인도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사실을 콜럼버스가 알게 된다면 괴로울까? 아니면 기뻐할까?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와 같다. 창작을 하기 전 창작물에 가진 나의 의도와 같은 것이다. 항해를 떠나기 전 어디로 가겠다는 마음과 같다. 하지만 결국 나의 의도와 전혀 다른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도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일들과 시간으로 인해 현재 내가 인식하는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그 모습이 더 훌륭할지, 혹은 비참한 결말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미완성 작품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나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도착할 때, 그 도착한 곳을 볼 수 없다. 도착이란 죽음을 의미하고, 죽고 난 뒤에는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나의 미래의 모습과 완성된 나의 모습에 집착하기보다는 조금 더 나은 방향이 있다. 어떤 미완성인 작품이 있다고 해보자. 그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태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들이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지만, 그 존재는 객관적으로 있기보다는 나의 주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기도 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할지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맞았던 아픈 기억을 통해 스스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 기억 덕분에 동일한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을 품어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모습대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진흙탕 길을 보면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 웃음은 나를 넘어서서 내 주변을 따듯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로 하여금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실제 삶보다 꿈은 한층 부풀려져 간다. 인류가 지금까지 다리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고, 달을 가면서 세상을 개척했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 또한 하나씩 나의 의도대로 부수고, 덧대고, 황량한 곳으로 보내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기술로 인해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말이다. 어쩌면 인류는 암을 정복하고, 노화를 막아서 100년이 아니라 300년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누구도 굶지 않게 될 미래가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일한 어쩌면의 힘으로 꿈과 기술은 나의 행복을 앗아갈 수도 있다. 나는 행복은 불확실한 것에 있지 않고 확실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현재의 나를 따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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