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배빗 babbit
Dec 09. 2022
오래전 늦가을 사촌 동생들이 독일에 놀러 왔다. 사촌동생들은 고모의 딸들이었는데, 같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잦아 친구처럼 지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공통의 기억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늘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한 걸로 유명한 철학자 칸트와 견줘볼 만한 일과를 가졌던 우리 할아버지 말이다.
동생들이 온 지 며칠 되었을 무렵, 친한 친구 한 명을 초대했다. 저녁을 같이 먹을 예정이었다. 우리는 내가 정성스럽게 한 한국식 요리를 먹으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사촌들과 나, 서로가 공유하는 오랜 기억들이 많아서 일까? 우리는 만날 때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같은 일화들을 곱씹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우리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친구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주저 없이 한 마디씩 던졌다.
할아버지는 매일매일을 정해진 일과에 따라 살았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고 신기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얘기하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적에는 은퇴하고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들이라면 보통 다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인생을 총망라해 잘 알고 지냈던 할아버지가 단 한 명뿐이라 비교할 대상이 없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나에게는 할아버지라는 단어에 속한 모든 범주 내에서 나의 할아버지가 표준인 셈이었다.
맞벌이인 부모님으로 인해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일상을 투철하게 지키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일과 중 낮에 하는 일과들은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는 무릎이 아프기 전까지 점심을 매번 똑같은 시간에 먹은 뒤, 양치를 하고 2시 즈음에는 꼭 지하상가에 나갔다. 무릎이 아프고 잘 걸을 수 없을 때부터는 집에만 있게 됐다. 할아버지는 점심을 먹은 뒤 휴식을 취하고 잠시 누워 낮잠을 잤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매번 누워 계셨기 때문에 낮잠이라고 표현하는 게 웃긴 것 같기는 하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잠을 잔 것인지 눈만 감고 휴식을 취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고는 4시 20분가량이 되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청소를 하기 시작하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청소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주섬 주섬 일어나 일단 청소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항상 빨간 챙이 있는 오래된 모자와 하얀 마스크를 쓰고, 격자무늬가 있는 초록 재킷과 파란 팔토시를 양쪽에 낀 다음,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다. 그러고선 거실 벽에서 먼지를 털 때 쓰는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낸 다음 방 곳곳을 쓸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엔 바닥에 가라앉은 먼지를 터는 것처럼 보였지만 할아버지는 늘 똑같이 안방과 거실, 큰방을 그런 식으로 청소했다. 할아버지는 이 단순해 보이지만 귀찮은 일과를 놓친 적이 없고 그 뒤에는 매번 같은 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가 저녁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게 되면 할아버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화를 냈다. 할머니는 늘 ‘어휴, 징그럽다. 징그러워.’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해오던 대로 늘 같은 시간에 식사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이런 일과를 친구에게 설명하며 우리는 약사동에 살았던 할아버지를 칸트에 비교했다. 할아버지만큼 철학자 칸트의 위명에 걸맞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말이다. 단지 할아버지는 철학자가 아니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알 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그 남의 말만 솔깃하게 듣는 팔랑 귀만 아니었으면 성공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하루 일과에서 알 수 있듯 끈기와 집착을 타고났다. 그 특성이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대철학자 칸트가 늘 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것이 유명해진 것처럼, 할아버지 또한 늘 4시 20분 즈음에 청소를 했던 것도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