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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 babbit
Dec 09. 2022
포춘차를 처음 봤던 때를 회상하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이맘때쯤에는 우리 네 가족이 분가를 하기 전이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큰 집은 아니지만 집 세 채를 갖고 있었는데 조그만 마당을 지나 위아래로 다닐 수 있었다.
우리는 맨 아랫집에 살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아서 인 건지 부엌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랫집에 사는 동안 부엌이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밥은 늘 마당을 지나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윗집,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먹었다.
언제부턴가 윗집의 부엌에 있는 고동색 식탁 위에는 게토레이 물병이 놓여 있었다. 게토레이 물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초록색에 가까운 노란 음료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물병에는 갈색 물이 들어 있었다. 그 물을 마셔 보면 제대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맛있는 차 맛이 났다. 그게 내게 처음으로 각인된 포춘차의 기억이다.
포춘차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마 포춘쿠키나 차 이파리 같은 것을 떠올릴 것 같다. 왜 이름이 포춘인지는 아마 영어 행운을 뜻하는 ‘fortune’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포춘차는 차 비스무리한 것이 맞다. 포춘차는 선라이더사에서 나온 건강 음료로, 정식 이름은 ‘포츈 딜라이트’다. 포춘차는 옥타코사놀, 녹차, 레몬, 국화를 갈아서 만든 분말인데, 그걸 물에 타서 먹으면 맛이 꽤 괜찮은 건강 음료가 된다.
내게 있어서 포춘차는 거의 인생의 전반을 같이 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것이라 무엇인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면 늘 포춘차가 있었고, 운동회나 소풍을 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포춘차를 타 주곤 했다.
지나간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할아버지는 늘 고모에게 포춘차를 주문하라고 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포춘차를 알게 돼서 포춘차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늘 포춘차를 한 무더기로 사곤 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산 포춘차 곽들을 늘 큰 방에 있는 티비 아래 서랍장이나 할머니 방에 있는 식기나 요리 도구를 넣어 놓는 농에 보관하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중 누가 포춘차에 더 집착했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할아버지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할아버지는 가끔 이상할 정도로 몸에 좋은 건강 보조제들에 신경을 쏟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포춘차가 없었던 적은 없었고 나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포춘차를 굉장히 아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포춘차를 나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사실 본인이 정당한 돈을 내고 산 것이기 때문에 비난하자고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실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주황, 파란 줄무늬가 있는 손바닥만 한 포춘차 봉지를 다섯 개 이상 준 적이 없다. 물론 그 이상 줬을 수도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포춘차에 대한 집착을 생각했을 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게 포춘차를 줬을 때 정말 많이 놀랐다.
내가 처음 독일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정말 많이 화를 냈다. 그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 빨리 자격증이나 따고 졸업을 해야 한다고 성을 냈다.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심지어 유학을 가면 나를 안 보겠다고 하기도 했다. 다행히 끊임없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주입식 세뇌로 인해 생각을 바꾸긴 했지만 말이다.
독일로 가기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할아버지를 보려고 들렀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웃는 얼굴을 지으며 포춘차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내게 건넸다. 포춘차가 들어 있는 자그마한 봉지는 정말 다섯 개가 아니라 서른 개도 넘는 것 같았고 나는 할아버지가 그 누구에게도 그만큼의 포춘차를 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빠한테 그렇게 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그만큼의 포춘차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기는 하다. 포춘차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굳이 받고 싶어 애가 타는 물건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포춘차는 거금을 들여 매번 살 만큼 매일 마셔야 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할아버지가 포춘차를 건네었을 때 나의 반응은 떨떠름한 편에 가까웠다. 그런 나를 보면서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본인이 그렇게 아꼈던 많은 포춘차를 손녀에게 주자는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하다. 사실 할아버지는 그 이후 나에게 포춘차를 다 마셨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다 마시라고 재촉 또한 하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제 와서야 궁금해졌다. 할아버지는 2021년 봄에 돌아가셨다.
2015년에 받았던 포춘차 봉지들은 여전히 책상 위 박스에 고이 담겨 보관 중이다. 손에 한 움큼 쥐어지는 포춘차를 볼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를, 쪼그려 앉아 바닥에 놓인 물컵 위로 포춘차 봉지를 털어 넣는 할아버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