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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Jan 19. 2020

38. 행복한 3시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아이들 공부도 제가 도와줄 수준을 넘어서고, 회사 생활도 몇 사이클이 돌면서 주말에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관성 탓인지 저는 주말에는 늘 대학 도서관에 갔고 거기서 책을 읽던, 음악을 듣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던, 아무튼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 거기에 붙어 있었습니다.


도서관은 시설이 참 좋았습니다. 온도 및 습도가 관리되었고, 편의점도 있고, 식당도 있고, 패스트푸드 점도 있고, 독립 영화를 위한 극장도 있었습니다. 책을 보다가 시간 되면 밥을 먹고, 때론 햄버거도 먹고, 영화도 보고, 공부하는 재학생들을 보고 옛날 제 모습을 회상하기도 하고….


친구로부터 연락이 오면 시내에 잠시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회사 동기인 정수형이 찾아와서, 같이 부암동으로 갔습니다. 시소가 있는 마당을 지나 돌담 계단을 내려가면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 주는 레스토랑 ‘아트 포 라이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밥을 먹고 근처 ‘부빙’에 가서 팥빙수를 먹으며 우리는 여고생처럼 수다를 떨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 음악, 영화를 즐긴다고 하니 형은 ‘너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여 좋다’고 하며 그림도 좀 보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정수형은 독서와 그림이 취미였습니다. 집에 놀러 가면 보이는 그림과 정독한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은 독자의 교양이 그려진 벽화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그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은 있지만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림은 제켜 두고, 그즈음 저는 다시 고전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였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던 그 커피 광고의 배경 음악이었습니다. 멜로디가 좋으니 여러 버전을 찾게 되더군요.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 나단 밀스타인의 바이올린, 바비 맥퍼린의 목소리…. 저는 밀스타인의 바이올린 연주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자주 듣게 되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과 길 샤함과 런던 심포니가 연주하는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에서 즐거움을 느끼다 보니 이들이 언제 적 사람들인데, 오늘 나와 감정선이 닿아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몇몇 작곡가들의 생년으로 컴퓨터에 폴더를 만들어서 곡들을 저장했습니다. 파헬벨과 우리 사이에는 약 300년의 시차가, 그리고 파헬벨과 사라사테 사이에도 약 200년의 시차가 있더군요.


1653년 파헬벨

1655년 비탈리

1678년 비발디

1685년 바흐

1685년 헨델

1743년 하이든

1756년 모차르트

1770년 베토벤

1782년 파가니니

1797년 슈베르트

1809년 멘델스존

1810년 쇼팽

1813년 바그너

1833년 브람스

1835년 생상스

1840년 차이코프스키

1841년 드보르작

1842년 마스테

1843년 그리스

1844년 사라사테

1857년 엘가

1873년 라흐마니노프

1875년 크라이슬러

1875년 라헬


저는 짧은 소품 위주로 음악 조각들을 즐겼습니다. 그게 편했습니다. 무슨 심오한 이해나 깨달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헬벨의 <캐논>, 비탈리의 <샤콘느>,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 쇼팽의 <야상곡 2번 2악장>,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중 아침>, 엘가의 <사랑의 인사>, 크라이슬러의 <프렐루드 앤 알레그로>, 그리고 라헬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런 곡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라헬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하루를 마치면서 듣는 자장가였습니다. 피아노 건반의 타격이 마치 깜깜한 하늘에 큰 별, 작은 별들을 땅땅 못질하는 느낌을 주었는데, 특히 2분 27초쯤의 글리산도를 좋아했습니다. 흐르는 듯한 그 연주는 밤하늘에 별먼지를 뿌리는 듯했습니다.




정수 형을 만난 그날 밤에 형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너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여 좋다.’


그랬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은 고맙게 잘 자라주고 있었고, 저는 때에 맞춰 승진을 했고, 주말은 여유로웠고, 이대로 시간만 잘 흘러가면 될 것 같았습니다. 연도별로 제 나이와 아이들 나이를 적었습니다. 제가 몇 살이면, 아이들이 몇 살이고….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다 보면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네가 4시에 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구절처럼 우리의 오늘은 행복한 3시였습니다.


그러는 어느 날 발령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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