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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글 Sep 21. 2022

아들이 읽어 준 앤 카슨

잘 몰라서 잘 안다

"글감이 뭐야? 글... 감? 단감?"


글감이 먹는 거라는 걸 아들한테서 배웠다.

가끔 세상에 살고 있는 이야기들을 반 정도만 알아듣는다면 오히려 더 현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쓰고 보니 괜찮아서 남겨두기로 한다.


아들은 종종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것 같지만 뒤에 물어보면 듣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여섯 살이 벌써 이렇게 응큼해도 되나 싶다.) 여섯 살의 볼일을 보면서 귀를 열어둔 거니 넉넉잡아 반 정도 듣는 것 같다. 이런 처세술 덕분인지 제대로 알아서는 할 수 없는 현명한 이야기를 던질 때가 있다. 한마디로 잘 몰라서 잘 안다. 글감을 감의 종류라고 생각하다니 그러고 보니 진짜 글이 되기 전 글감은 가을 단감처럼, 홍시처럼 달콤하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굴러다니다가 알게 된 앤 카슨의 책을 두 권 읽었다기보다는 구경을 했다. <빨강의 자서전>을 반 정도 읽자 내가 네발 달린 동물같이 느껴졌다. <남편의 아름다움>을 읽으면서는 혓바닥으로 책장을 넘길 뻔했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증명하고 싶어 졌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쓴다.


웬걸. 글을 쓰다 보니 <남편의 아름다움>이 이해가 된다. 읽어서 알게 된 게 아니고 쓰면서 알게 됐다. (책은 자주 그냥 종이 묶음이다. 불 지피기 좋은) '남편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다. 나의 고통도 실연도 다 도구일 뿐 아름다움만이 작가의 진정한 관심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이야기하기는 성에 안차니까 우리가 조금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실연의 고통을 마이크 삼아 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법륜스님이 사람은 괴롭고 싶어서 괴로워진다는 기똥 찬 말씀을 해주셨는데 괴로운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예술가의 열정과 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염려증이 있고 제대로 실리적인 나는 그 고통이 도대체가 어렵다. 사랑도 인생도 사뿐사뿐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험난한 시련이 한 번도 안 찾아왔다는 것은 찾아올 고통이 있다는 뜻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련을 불러들일까 덜컥 무섭다. 그러니 괴로움은 괴로운 때 생각하는 걸로 한다. 괴로운 때가 되면 내 고통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아, 나에게는 아름다움보다는 유머가 와닿는구나. 고통을 글감 삼아 무언가를 만들었고 그걸 보고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는다면 심하게 자랑스러울 것 같다! 만 자 이제 그만 잡념은 거둬들이고 계속하던 일을 하자. 열/심히. 열나게 심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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