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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Dec 31. 2022

내가 왜 쓰는지 말할 때 달리고 싶은 이야기

조지 오웰과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영국과 일본이라는 두 섬나라를 대표하는 두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하나는 조지 오웰이 쓴 에세이 중 29편을 추려 모은 ‘나는 왜 쓰는가'이고, 또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참고로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에세이는 조지 오웰이 직접 엮어 낸 것이 아니라 번역하신 이한중 님이 골라 엮어 낸 것이다.


http://aladin.kr/p/eFfW2

http://aladin.kr/p/dFdN5


 ‘동물농장'과 ‘1984’, ‘상실의 시대'와 ‘기사단장 죽이기'. 각 소설 내용을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 작가 성향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지극히 사회적인 작가 조지 오웰과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에서도 본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물론 하루키 역시 일본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언더그라운드'와 '약속된 장소'라는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냈다고 알고는 있지만, 이후 발표한 '해변의 카프카'와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어보면 다시 '상실의 시대'로 돌아갔다는 느낌이다).


 조지 오웰은 왜 글을 썼을까.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해 자기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구체적으로 빈부 격차와 사회 양극화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힘써 전파하는 한편, 히틀러로 대표되는 당시 유럽 사회를 휩쓸고 있던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글을 써 내려갔던, 사회적인 성격이면서 사회주의자였던 작가다.

 상당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에세이 모음집에서도 그런 그의 성향이  드러난다. '동물농장' '1984'에서 적극적으로 다뤘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 애국주의, 평화주의 같은 사상은 물론, 육아(에세이를 읽으며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싱글 대디였다), 교육, 문학, 과학, 원자탄, 선호하는 , 언어로써의 영어 사용 행태, 올바른 여가, 스위프트와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와 간디  유명인에 대한 평가까지 잔뜩 담겨 있다. 그야말로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속속들이 담겨 있는데(바로  점에서부터 사생활 노출을 최대한 자제했던 하루키와 차이가 난다고   있다), 한두 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읽는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에세이다.

 반면 하루키는 소설뿐 아니라 삶 속에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였고 이 책에서도 그 성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달리기를 하면서 하루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아 성찰과 자기 극복, 이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조지 오웰과 다르게 그는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탐색하고 성찰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작가였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단련하고 정진해 나가면서 심신의 세밀한 변화를 캐치해 때로는 원인을 파악해 개선하고 때로는 노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체화하는 그는, 에세이에도 잠깐 언급되는 것처럼 자기가 써온 소설 내용과는 다르게 건전하게 생활하는 작가의 모범 사례라고 부를 만하다. 건전하다는 것에 극한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 극한으로 건전하게 생활하는 사람이다(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던 조지 오웰과는 다르게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담배도 끊었다).

 또한 하루키는 조지 오웰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뭐라고 할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다를 것 같은데요.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는 그런 제가 마음에 듭니다. 아무쪼록 저는 제 길을 이대로 쭉 달려 나갈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도의 논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런 이 두 작가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글투, 또 하나는 음악에 대한 견해다.

 먼저 조지 오웰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다. '이 현상의 본질은 이것이다!', '이게 옳다!', '(우리 편과 상대 편 모두에게)정치 좀 잘 해라!', '생각은 하고 사는 거냐!'라고 외친다. 반면 하루키는 '~라고 할까.', '어쩔 수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와 같은 말투를 즐겨 쓴다.

 또 하나는 음악에 대한 두 작가의 견해다. 먼저 조지 오웰이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아래는 ‘행락지'라는 에세이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음악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가능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의 기능은 생각과 대화를 막는 것이며, 만약 음악이 없다면 끼어들게 될 새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 여기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음악은 대화가 심각해지거나 심지어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막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말소리는 음악을 경청하지 못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생각이라는 끔찍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다.


 ‘물속의 달'이라는 에세이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펍을 묘사하는데 그 펍의 주요 조건 중 하나가 ‘그랜드 피아노 같은 것이 없고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일 정도다.

 반면 하루키는 달리는 것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하는 작가다. 에세이에는 그가 달리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즐겨 들었던 음악 얘기가 자주 나오며, 수집한 LP 판이 총 몇 장인지 자신도 모르겠고(LP 판만 모아 놓은 방이 있다고 한다!) 세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음악을 수시로 귀에 흘려 넣는 하루키와 대화에 방해되는 음악은 멀리 치워버리는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반면 하루키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여기저기서 클리셰처럼 나온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득도를 꿈꾸며 조용히 정진하는 하루키와 끊임없이 타인과 대화하며 자기 생각을 전파하려는 조지 오웰. 그런데 또 한편으론 (요즘에는 많이 바뀌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양은 각 개인보다는 모인 전체를 중요시한다고 알려져 있었고, 반대로 서양은 전체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두 사람의 성향이 전통적인 동서양의 문화와 완전히 대치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조지 오웰과 하루키가 태어나 자란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을 것 같다. 조지 오웰은 두 차례의 대전을 실제로 겪었고 그 사이 발발했던 스페인 내전에는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그는 국가와 정치가 개인의 삶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던 시대를 살았으며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생존이 그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어느 한 정치적 사상이 확산되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던 시절을 살았다. 좋든 싫든 조국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뭉쳐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다.

 따라서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고, 가끔씩 먼바다에 떨어지는 (외부인이 보기에는 별로 걱정되지도 않을 것 같은) 북한발 미사일 외에는 이렇다 할 외세 침입 걱정도 없었던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하루키와는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그 시기의 일본은 모든 측면에서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잘 나가던 때가 아닌가.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 문제도 모두 함께 잘 나가는 시절에는 별로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좋은 곳에서 더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면 대부분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깐 이런저런 문제가 사회에 내포돼 있었다고 해도 크게 불거져 나올 계기가 없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시대적 배경보다 개인의 성향이 더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깊이 조사해 비교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자료를 찾아보고 쓴 것은 아니고 단지 내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성향의 결과로 조지 오웰은 자녀를 낳아서 아내를 잃고도 싱글 대디로 자녀를 양육했고, 하루키는 자녀를 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당연히 이것도 내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성향 중 무엇이 더 나은지를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에세이를 읽으며 내가 어떤 성향을 더 선호하는지 그리고 그 선호와 상관없이 현실의 나는 어떤 성향에 더 가까운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고 그 내용을 정리해 놓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소설을 쓴다면 조지 오웰이 다룬 주제를 다루고 싶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런 욕구가 상당히 커졌다. 나 혼자서는 그럭저럭 비벼볼 수 있는 세상이다 싶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자꾸 사회에서 무섭고 위험하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부분만 부각돼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훌쩍 자라서 최대한 안전하게 꾸며놓았던 내 집과 내 곁을 떠나 학교에서 홀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시간이 많아진 첫째와, 곧 그런 첫째를 따라갈 둘째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서 이 사회를 보다 안전하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정말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누구보다 잔소리가 많은 부모가 돼 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 일상생활은 하루키와 조금 더 닮았다. 나 역시 운동할 때 헬스나 수영, 자전거, 달리기와 같이 혼자서 어느 때든 바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을 선호하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나를 돌아보며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더 즐기기 때문이다. 책을 읽든 달리기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외부 간섭 없이 온전히 홀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여가 시간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덕분에 테니스나 골프에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내가 이 둘과 다른 점은, 이 둘은 겉으로 보이는 스타일이 어떻든 간에 속이 굉장히 단단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과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자기만의 길을 확고히 정한 뒤 누가 뭐라고 하든 묵묵히 개척하며 걸어 나갔지만 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외부 간섭이나 영향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혼자 있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꾸 못난 나를 거울에 비춰보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더 수련이 필요하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써보고 더 많이 세상을 경험해 봐야 한다. 어쩌면 나에게는 조지 오웰의 길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길을 적절히 섞은 나만의 길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담으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집에 두 권이 됐는데 둘 다 선물로 받은 책이다. 책을 선물 받는 것 자체가 요즘 시대에는 흔치 않은 일인데 그 흔치 않은 일을 겪으며 같은 책을 한 번 더 받는다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받는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았다. 4~5년 전에 선물 받아서 읽고 난 뒤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읽을 기회가(그것도 새 책으로!) 말 그대로 선물처럼 다가왔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걸 얻을 수 있어서 선물해 준 분께 참 감사하다는 기록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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