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gmalion, George Bernard Shaw
저자: 조지 버나드 쇼
번역: 김소임
출판: 열린책들
출간: 2011.06.30.
비스타 워커힐 서울 호텔에 묵으면 투숙객에 한해 개방하는 스카이 야드에 갈 수 있다. 호텔 4층에 위치한 야외 공간으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크고 널찍하고 이국적인 베란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라서 수많은 한강 야경을 봐왔는데 그중에서 손꼽을 만한 곳이었다. 비스타 워커힐 서울에 묵는다면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사진 출처: https://www.walkerhill.com/vistawalkerhillseoul/welcome/Gallery)
피그말리온 독서록을 호텔 베란다 얘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아래 사진 때문이다.
Life isn't about finding yourself.
Life is about creating yourself.
- George Bernard Shaw
스카이 야드 베란다 유리 난간에는 위 사진처럼 명언들이 적혀 있는 난간이 몇 개 있었는데 하나씩 쭉 읽어가다가 저 문구가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 버나드 쇼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고 이왕 읽는다면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을 읽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
버나드 쇼는 죽은 뒤에도 말 한마디로 책 한 권을 팔았다.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조각한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왕이자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다.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열심히 조각한 뒤 조각을 너무 잘한 탓에 조각상(갈라테이아라고 이름도 지어준다)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고, 아프로디테가 그 간청을 들어준 덕분에 조각상은 사람으로 변해서 피그말리온과 결혼해 아들까지 낳는다.
제목을 피그말리온으로 정한 이 책 역시 조각하는 과정까지는 신화와 비슷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상류층 부잣집 출신이자 음성학 교수인 히긴스는 우연한 계기로 길거리에서 만난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 둘리틀을 상류층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일을 맡게 된다. 이 소설은 그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책 서문 제목은 '음성학 교수'다. 사람 말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음성학이라는 게 있는 줄 몰랐던 터라 처음에는 이름이 '음성학'인 교수 얘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음성학을 전공한 교수이자 자기 지인 얘기였다.
갑자기 음성학 교수가 등장하는 이유는 서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버나드 쇼는 서문에서 이 희극을 집필한 이유가 음성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버나드 쇼는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 이야기에서 콘셉트를 따와 자신의 집필 의도를 반영하고 훌륭하게 각색해서 이 소설을 탄생시켰다.
작가 의도에 따라 이 소설에서 음성학은 아주 중요한 학문으로 그려진다. 부잣집 상류층들이 음성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설정도 그렇고, 소설 앞부분에서 음성학자인 주인공이 사람들의 말투를 듣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서 주로 어디서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는 장면을 근사하게 그려내는 것도 그렇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마치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이 왓슨(마틴 프리먼)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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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과 버나드 쇼가 별도로 붙인 후일담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을 산 걸 후회했다. 일단 음성학이라는 학문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이야기 전개도 가난한 하층 여인이 상류층 부잣집 도련님을 만나 인생 역전한다는 그렇고 그런 흔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성격 설정도 (당시에는 신선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흔해 빠진 설정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히긴스 교수는 자기가 좋아하는 학문인 음성학 분야에서는 뛰어난 실력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전문가지만 일상에서는 늘 주위 사람들에게 툴툴대며 짜증을 내는 성격이다. 그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인 일라이자와 엮이면서 본래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그녀에게 자꾸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게 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형적인 로맨틱 드라마 속 재벌 남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자 주인공 일라이자 둘리틀은 가진 것은 없지만 밝고 활달하며 목소리도 크고 에너지 넘치는 역할로 나온다.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도 있어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지 자체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드러내 놓고 자기를 싫어한 사람도 기꺼이 찾아가서 당당한 태도로 자기 생각을 전달한다. 전형적인 로맨틱 드라마 속 가난한 여친 콘셉트다.
여기까지 파악했을 때 그만 읽을까 고민했지만 시작한 게 아까웠고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았기에 끝까지 읽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그 유명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이라고 하니 우리에게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원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신선한 콘셉트일 수도 있었을 것 같고, 내가 피그말리온이 지겹다고 느끼게 된 건 그 아류를 너무 많이 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잠깐 NAVER 영화에 올라와 있는 '마이 페어 레이디' 줄거리를 읽어보자.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0660
언어학자인 헨리 히긴스 교수(Professor Henry Higgins: 렉스 해리슨 분)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피커링 대령(Colonel Hugh Pickering: 윌프리드 하이드-화이트 분)과 묘한 내기를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즉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하층 계급의 여인을 한 명 데려와 정해진 기간 안에 그녀를 교육시켜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 내기의 실험 대상으로 선택된 여인이 바로 빈민가 출신으로 꽃을 파는 부랑녀 일라이자 토리틀(Eliza Doolittle: 오드리 헵번 분)이다. 그녀는 히긴스 교수로부터 끊임없는 개인 교습을 받게 되는데, 그녀 자신은 이 교육을 하나의 고문으로 받아들인다. 마침내 히긴스 교수가 요구하는 중심 문장 "스페인에서 비는 평야에만 내린다(The Rain-In Spain-Stays-Mainly In The Plain)"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투박한 런던 말씨와 촌스런 악센트를 들을 수 없게 되고, 결국 히긴스 교수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변한 엘리자가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소설과 내용이 거의 똑같은데 결말이 다르다. 만약 소설이 영화처럼 끝났다면 책 읽은 시간이 너무 아까웠을 것이다. 소설은 영화처럼,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처럼 끝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히긴스 교수와 일라이자는 연인이 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 미묘한 기류가 흐르긴 하지만 거기까지다. 소설에서 일라이자는 두 부잣집 도련님을 선택하지 않는다. 귀족이긴 하지만 몰락해서 당장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그렇지만 자신에게 다정하고 친절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구원하는 입장이 아니라 함께 삶을 개척해 나갈 필요와 의지가 있는 또 다른 남자 등장인물인 프레디를 선택하고 그와 결혼한다.
해설에 따르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처럼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나 영화에서는 종종 히긴스 교수와 일라이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결말을 바꿔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히긴스 역을 맡은 배우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라이자에게 사랑을 표현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
책 마지막에 붙어 있는 후일담은 그런 사람들에게 왜 자신이 일라이자와 히긴스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이 책을 결론짓지 않았는지에 대한 버나드 쇼의 설명이다.
자꾸 원작과 다르게, 그것도 원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각색해 버리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 싶다. 다른 부분도 아니고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마음대로 바꿔서 무대에 올려버리다니.
물론 각색한 입장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둘이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결말을 냈다면 이 소설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통속극 정도로.
이 책이 통속극을 벗어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일라이자가 히긴스나 피커링 대령이 아니라 프레디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내 선명하게 그려냈던 일라이자의 성격과 어울리는 결말, 진정 자신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행에 옮기는 일라이자의 선택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선택하고 실행하고 책임지는 일라이자의 모습은 내가 처음 버나드 쇼에게 관심을 갖게 된 문구와 연결된다.
Life isn't about finding yourself.
Life is about creating yourself.
- George Bernard Shaw
이런 결말 덕분에 일라이자는 감히 히긴스 교수가 조각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 헤매던, 의지를 갖고 걸어 다니던 원석이었다. 그녀는 다른 어딘가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굳건한 의지와 용기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새로운 자신을 창조했다.
이 소설에서 일라이자는 자기 인생의 피그말리온이자 갈라테이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