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시간이 10분 남았다는 휴대폰 알람을 끄고 집 밖으로 나선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오늘 하루도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린다.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이 아니다. 둘째를 태운 유아차를 밀며 아파트 상가 앞으로 이동한다. 처서가 지났지만 따가운 햇볕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귀찮아서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는데 첫째의 하원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면 후회가 된다. 모자라도 쓰고 나올 걸. 첫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인 아이스크림가게에 가자고 말한다. 아직 말을 못 해서 정확한 의사 표현이 어려운 둘째지만 야무지게 자기가 먹을 젤리 하나는 챙긴다. 집에 도착해 창문을 닫고 에어컨부터 켠다. 둘째는 조금만 더워도 땀으로 머리카락이 다 젖는다. 아이들이 간식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서둘러 저녁을 준비한다. 쌀 두 스푼을 씻어서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르고 물에 불린 미역과 핏물을 뺀 국거리 소고기를 참기름에 달달 볶는다. 눈으로는 둘째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쫓으며 귀로는 첫째의 이야기를 듣고 손은 칼질을 한다. 첫째는 이야기 중간중간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 상냥하게 대답까지 할 정신은 없다. 아이들이 등원한 시간에 저녁 준비를 미리 했다면 어쩌면 지금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이 등원한 시간에 집안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미역국이 완성되어갈 무렵 아이폰 진동이 울린다. 일 년에 한두 번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오는 정의 전화다. 정의 전화라면 무조건 받고 싶다. 저녁 준비를 잠시 멈추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정은 대학 동기로 만나 내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정은 대학시절 성적으로 과 탑을 놓친 적이 없다.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졸업 전에 취업도 한 번에 성공했지만 현재는 우체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다. 월급을 아껴 종잣돈을 마련해서 재개발 지역에 투자를 목적으로 집을 소유하고 있다. 학군이 좋은 위치에 전세를 살고 있을 만큼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있어 보이는 소비엔 관심이 없다. 바른 길로만 나아가는 나의 인생선배. 나는 정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정과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정은 고민이 있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고민이 있는데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나는 두 가지 선택사항이 내 앞에 있을 때 모두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쪽의 선택을 주로 하는 편이다. 그런 선택으로 인해 인생의 레이스에서 한 단계 도약하기보다는 추락하는 경험이 많았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성장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보다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쪽으로 질러버린다. 그래야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남 탓을 할 수 없다. 이런 내가 정의 고민상담을 잘해 줄 수 있을까?
정은 지금처럼 워킹맘으로 계속 살아가야 할지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정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동안 몸과 마음의 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기 때문에 나도 뭐라고 싶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정이 물었다.
“너는 아이들에게 포기가 안 되는 욕심 같은 게 있어?”
“글쎄… 얘들이 어려서 아직 성적에 대한 욕심도 없고…”
“그렇구나…….”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정에게 전하고자 했던 내 생각이 잘 전달된 걸까 걱정이 됐다. 정은 내가 아끼는 사람이니까. 정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정을 응원하고 있다고, 정이 고심해서 마음을 굳힌다면 버린 카드에 대한 미련이 없을 만큼 잘 해낼 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나? 내가 고민해결에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나를 믿고 고민을 말해줘서 고마웠다는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아이들을 재우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에게 톡을 보낸다.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이 저작권료 받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 같아.’ 정은 잠이 들었는지 답이 없다. 옆에 있는 남편에게 물어본다.
“오빠는 얘들이 커서 무슨 일 했으면 좋겠다, 그런 로망 있어?” “박세리나 손흥민 같은 운동선수.”
“손흥민 같은 세계적인 선수는 우리나라에 딱 한 명 이잖아. 오빠 너무 꿈이 큰 거 아냐?”
“로망을 말하라며”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는 축구선수였고 축구감독이다. 누구보다 축구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이다. 아들의 훈련은 말로 지시만 내린 게 아니라 아들과 똑같이 함께 운동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 아이가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 많지만 과연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함께 훈련을 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쉬울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접고 아이의 일정에 맞춰 생활할 자신이 없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내 로망을 실현시켜 주길 바랄게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내가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저작권료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빠른 거 아닐까? 아이들이 성년이 되려면 적어도 15년 정도 남았는데.
“인생을 80 생으로 봤을 때, 서른 아홉은 A면이 다 지나가고 B면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글을 본 적 있다. 인생의 B면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도 나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소설가’라는 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이 등원한 뒤 생기는 자유 시간에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워드를 켠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막막함에 꺾이지 않게 일단 뭐라도 자판을 눌러본다. 내가 살면서 느꼈던 감정은 어쩌면 나만이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서 기록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무도 내 글에 관심이 없어서 저작권료를 벌지는 못하더라도 기록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알아가고 치유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에선 의미가 있다. 과거엔 싸이월드에 매일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이었고, 현재는 공모전을 노리며 쓰는 사람이다. 잘하면 미래엔 독자들과 만나 북 토크를 하고 있는 쓰는 사람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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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쓰클럽 다섯 번째 주제. “아이덴티티’2021.09.02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