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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하 Feb 16. 2023

레몬빛 눈자위에 자두빛 눈동자를 가진

“어서 와. 아무것도 아니지?”

미로를 지나 한 길로 난 숲을 친구와 걷고 있다. 역시나 미로의 끝에 친구는 서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빗금이 가 상처 난 손을 덥석 잡았다. 따갑지만 따뜻했다. 이 아이의 손에도 피가 데칼코마니처럼 묻었다. 친구는 내가 기억을 다 해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웃음을 짓고 아무 말 없이 친구와 손을 잡고 그저 걷고 있다.

숲의 끝자락.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이 동굴은 빛하나 들지 않는 어두움 그 자체이다. 내가 들어서면 곧 물로 가득 차 숨하나 들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그게.. 끝인가..?

“끝 아니야.”

친구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친구는 나를 닮았다. 친구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과 친구의 모습이 정말 많이 닮아있다. 왜 몰랐을까?

“끝 아니라고. 다만 네가 후회한다면 우린 다시 그 홀로, M87로 돌아가게 될 거야.”

“M.. 87?”

“응. 그리고 지금까지의 여정을 다시 반복하게 될 거야.”

“하지만 이전 회차 때 내가 물속에서 후회한다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그 후회를 솔직하게 떠올렸기 때문에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거잖아.”

“맞아. 그런데 내가 함께 있을 뿐 이곳에서 벗어난 게 아니잖아?”

“그럼 벗어나는 게 목표야?”

“목표라기보단, 너는 이곳을 살려놓고 벗어나서 다시 살아가야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뭘 살려? 여길? 어떻게? 아니, 왜? 여길 벗어나는 게 M87로 가는 게 아니야? 거기에 내 방이 있잖아! 다시 살아간다니? 그럼 뭐 난 지금 죽은 건가?”

“이 동굴에 갇혀있는 물이 우리가 처음 이 공간에 첫걸음을 했던 잿더미로 변한 연못에 가득 차야 해.

이곳 모두가 그 물로 가득 차서 모든 생명이 깨어나야 해. 이곳은 오색물고기가 사는 곳이거든. 그런데 물이 모두 숨었어. 두려워서. 그래서 작은 열기에도 연못이 마르고 타버렸어. 후회와 두려움의 공간이 되어버린 거야.”

“뭐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근데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야? 난 그때도 그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죽을 뻔했다고.”

“너의 이야기이니까. 지금까지 건너온 황폐해진 땅들도 너이고. 지금 저 동굴에 갇혀서 웅크리고 있는 물도 너이니까. 너니까. 너만이 가능하지.”

“…”

“너는 너를 해방시키러 왔을 뿐이야. 과거는 바뀌지 않아. 그런데 과거에 갇혀있잖아. 네가 날 깨운 건 네가 널 깨운 것. 그뿐이야. 나는 너니까.”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레몬빛 자위에 자두빛 긴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바로 이 친구이고 또 그게 바로 나라는 것이 체감되고 있었다. 그 눈은 나에게 용기라 느껴졌는데, 용기란 것은 생각보다 따뜻하거나 강렬하거나 에너지 넘치는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약하지만 날카롭고 유연해서 부러지지 않는 느낌이다.

“나를 부르면서 네가 했던 후회는 뭐였어?”

“후회… 과거를 바꿀 수 없는데 너무 긴 시간 동안 이 공간들을 지나온 거. 시간이 아까워.”

“그래서 이번엔 좀 더 빨리 통과한 거 같아?”

“몰라. 그건. 뭐가 더 빠른 건지는. 다만, 과거는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거뿐. 그저 과거일 뿐. 뭐.. 그런 거.”

“그럼, 이번에 다시 동굴에 들어가 물이 되어도 후회할 일은 없어?”

“물.. 이 된다고? 정말, 나 죽는 거야?”

“글쎄…”

“소원하나만 들어줘.”

“뭔데?”

“네 눈을 나에게 줘. 그 레몬빛, 자두빛. 그 용기를 나에게 줘.”

친구는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자신의 눈에 갖다 댄 후 눈을 감은 채 다시 손바닥을 나에게 갖다 대었다. 이내 나는 눈을 떴다. 친구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어때? 느낌이 와? 용기가 나?”

"어엄.. 잘.. 모르겠어.”

살며시 친구는 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

“수인아. 그 눈은 원래부터 너의 것이야. 너였어 그건. 그 물속에서 응시한 건 너 자신이야.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굴에서 물이 터져 나와 친구를 삼키고 나를 덮쳤다.

물은 완벽한 구형태인 이 모든 공간을 가득 메웠다. 높은 곳의 큰 웅덩이와 하늘까지 모두 물이 삼켜 이 세상은 온전히 물이 되었다. 그리고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오색빛깔의 물고기들이 흘러나와 유영하고 있었다.



수인이는 물이 된 걸까, 

이제 더는 후회하지 않을까,

적어도 더는 과거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만큼은 깨달아 보이던데.

아참 수인이의 눈에 오색물고기의 눈은 무슨 색으로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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