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dyton Apr 10. 2024

헤어컷과 밀크티

얇은 코트만 하나 입고 외출해도 춥지 않다. 며칠째 중국에서 불어오는 희뿌연 먼지바람에 익숙해져 버렸다. 평일 오전, 재즈가 흐르는 온통 하얀 미용실은 두세 명의 손님을 제외하고는 한산하고 여유롭다. 내 고실거리는 곱슬 머리카락의 실체를 아는 디자이너는 늘 그렇듯 아무 질문도 없이 쓱싹쓱싹 가위질을 시작한다. 단골 카페에서 바리스타가 손님의 얼굴만 보고 이미 커피를 내리기 시작해서 '늘 먹던 걸로'라는 말도 필요 없는 상황과 같달까. 그녀가 편하게 머리를 자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폰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다. 탁 하고 드라이어의 전원을 넣는 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 눈을 뜨면 환한 조명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전면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인다. 평소에는 없던 어색한 컬(이걸 뽕이라고 하던가)이 들어간 머리를 멀뚱하게 쳐다보는 어색한 표정의 사람. 디자이너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형식적인 인사로 마무리한다. 마지막에 발라주는 에센스의 향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녀 나름의 매뉴얼일 것이므로 그 정책을 존중한다.


엇비슷한 길이로 유지하는 내 짧은 단발머리는 가위질의 결과가 늘 예측가능한 범주 안에서 맴돈다. 이것마저 수 십 년을 곱슬머리로 살아오면서 쌓인 경험치로 어느 길이가 가장 손이 덜 가는 길이인지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디자이너에게도 특별히 신경 쓸 포인트가 있다거나 도전적인 과제는 아닐 것이다. 대형 거울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상황이 불편한 손님과 쉽고 재미없는 일이니까 빨리 해치워버리려는 디자이너. 양자 간 암묵적인 합의 아래 이 모든 과정은 채 삼 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난다. 개인사를 묻지 않는 그녀의 예의 바른 무관심이 좋다. 집에 와서 우유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얼그레이를 보고 있자니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밀크티가 좋은 계절도 이제 다 갔나 싶다. 주방의 아일랜드에는 오래된 전기 쿡탑이 하나 달려있다. 처음엔 인덕션이 아니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자성이 없는 용기로도 차를 끓이고 데울 수 있어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다. 덕분에 이 겨울을 따듯하게 잘 지나왔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