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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풀씨 4

by 보리

풀씨 4



나는 가끔

내가 흙이기 이전에

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다 남은 재들이

차갑게 식어

먼지로 흩어지고,



그 먼지들이

강물과 바람의 손을 빌려

이 작은 몸까지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별이 한 번 눈감는 사이에도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길을 나선다.



떠나보낸 사람,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조용히 스러진 꿈들이

눈송이처럼 포개진 좌절들이,



한 번에 녹아내려

강이 되어 흐르는 까닭은

무덤처럼 보이던 흙더미 위로

어느 봄날에 갑자기

숲이 올라오는 이유와 같다.



네가 살아낸 수많은 떨림이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

다른 사람의 내일을

천천히 밀어 올리고 있었으리라.



그러니

내가 흙으로 돌아가는 날,



먼 하늘 어딘가

별 하나 떠 있다면



우리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내일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을

결국

살아 내리라.



그러니 괜찮다.



더는 내려갈 수 없다고 믿던 그곳,

끝이라 생각한 순간에도

그보다 더 아래에서

삶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시(詩) 학대범 언니를 가진 사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첩첩산중 산골이었다.

태백산이 우리 집 뒷동산이었고, 동해가 우리 집 앞개울이었다.

거창한 호연지기를 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집 앞뒤를 깎아지른 산이 하늘을 막아서 있었고, 방학마다 외갓집이 있는 동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놀던 추억이 그렇게 말하게 한다.


5남매 맏이인 언니는 전형적인 K-장녀였다.


내가 열 살 무렵, 엄마가 해외취업으로 집을 떠나셨다.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지금도 의아하지만, 어쨌든 엄마는 떠나셨고 언니가 그 빈자리를 메웠다.

할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맡으셨지만, 그때부터 모든 결정과 군기는 언니의 몫이었다.


한 번은 엄마께 보내드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언니는 동생들을 몰고 시내 사진관에 갔다. 찍은 사진을 찾아오고 나면 우리는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엄마께 편지를 써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보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은 편지를 제대로 못 쓴다고 꿀밤을 맞았다.


그때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던 언니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의 눈에는 어른이었다.

성격이 급해 생각하는 순간 행동으로 옮기는 언니는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러니 언니의 말이 집안의 법이요 진리였다.


한없이 유하셨던 부모님 대신 우리 군기를 잡았던 언니.

평생 부모님께 욕 한 번들은 적 없고, 매 한 대 맞아본 적 없던 우리였지만, 다혈질인 언니는 화가 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한 번은 엄마가 "부모도 안 때리는데 왜 동생들에게 손을 대냐"며 크게 역정을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여름밤들이 생각난다.


산이 높아 모기도 없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여름저녁이면 언니는 어린 동생들을 마당 들마루에 쪼르륵 눕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주변에는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반짝이며 날아다니고, 하늘에서는 별들이 은하수를 타고 흐르다 떨어져 내렸다.


한때 언니는 무협지에 빠져 있었다. TV도 없던 시절, 지붕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무사들과 물 위를 달리며 사방으로 장풍을 날리면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이야기는 스릴 넘치는 영화였다.

천하명검을 쓰는 수많은 장수 이야기는 언니가 삼국지를 읽을 때 들었다.


그러다 "빨간 손으로 닦아줄까? 파란 손으로 닦아줄까?" 하는 뒷간 괴담이 나오면 머리칼이 곤두서고 엉덩이를 움찔거려야 했다. 더 어렸던 막내는 자장가로 들렸는지 늘 먼저 잠들어버리곤 했다.


고등학생이 된 언니가 어느 날부터 그때 한창 유행하던 시화집 공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책 위에 단풍잎과 예쁜 나뭇잎을 놓은 후, 물감을 물에 풀어 빗을 대고 칫솔로 주변에 뿌렸다. 물감이 흩어진 후 단풍잎을 떼어내면 그 무늬가 예쁜 모습 그대로 형태 도장처럼 되어 공책에 남았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예쁘게 꾸민 공책에 언니는 시를 썼다. 그런 시화 공책이 두세 권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니는 시화공책에 있는 시를 외우게 했다.


젠장.

언니가 무서우니까 어린 나는 뜻도 모르면서 기를 쓰고 시를 외웠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수많은 시를 외우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외울 때였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걸 외우면서 뜻도 모르면서 얼굴이 빨개지고 무안했다.


시화 공책이 한 권씩 만들어질 때마다 시를 외워야 했다. 이제는 외국 시인의 시였다.

‘미라보 다리 아래로 세느강은 흐르고 /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도 외우고,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도 외웠다.



간혹 불시에 암기 검사를 하던 언니.

그러니 언니는 어린 나에게 나이에 맞지 않는 시를 외우게 한 '시(詩) 학대범'이었다.

외우지 못한 시들도 외울 만큼 읽었던 것 같다.


많은 시를 뜻도 모르고 외우면서,

시는 모르겠고 언니가 가진 시화 노트가 너무 예뻐서 갖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단풍잎이 가장 예쁘게 내려앉은 시화공책 몇 장을 찢어냈다.

그리고 며칠을 언제 들킬까 가슴 두근거리며 지냈다.


드디어 들통이 났다.

불같이 화가 난 언니가 ‘너가 이거 찢었지?’ 소리를 지르더니 빗자루를 들었다. 놀란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웃기는 건 내가 달리기를 아주 잘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마음만 먹으면 잡을 것 같지만, 언니는 유독 달리기만 못했다.

정신없이 집 뒤 가파른 산으로 도망쳤는데 언니가 따라오지 못했다.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산길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 그때 산속에 파놓았던 방공호로 들어갔다.

그러다 피곤해서 어느새 잠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뜨니 사방이 캄캄한데 밤하늘에서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며 시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구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아, 윤동주 시인이 이 별들을 보며 시를 썼구나.'

감동에 젖어 감탄하면서 여전히 별이 쏟아지는 산속 방공호 구덩이 안에 있던 낙엽더미 위에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네나 뱀이 나왔을 수도 있는데,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해서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후로 시가 가슴으로 느껴지곤 했다.

청포도를 보면 저절로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라고 중얼거렸고, 지금도 산책길에 낙엽을 밟으며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몇 년 전 윤사월이 있었던 해, 온 산에 송화가루가 날리고 뻐꾸기가 울던 날.

박목월 시인이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하면서 내가 서 있는 옆으로 걸어왔다.


어린 나에게 시 암기를 강요했던 '시(詩) 학대범' 언니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밀어 올려 키운 풀씨는 언니였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小學校때 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異國 少女들의 이름과 벌서 애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푸랑시쓰•짬」 「라이넬•마리아•릴케」이런 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一九四一. 一一. 五.





윤사월 -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1946년 발간 시집 『청록집』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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