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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풀씨 3

by 보리

풀씨 3



나는

비늘처럼 얇은 약속들을 접어

허공의 주머니에 넣고 길을 나섰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비집고 나오는 체념 섞인 고집으로

몸은 먼지처럼 떨리고,

바람은 자꾸 나를 부른다.



사람들이 말하더라.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가진 가장 젊은 시간이라고.



맨발의 이슬이 얼마나 차가운지

한 번도 묻지 않은 채,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가다가 돌아선 갈림길,

그곳에서의 망설임도

너라는 존재가 흔들릴 수 있었던

시간의 증거일 뿐.



그 또한

섣불리 실패라 부를 수 없는

아름다운 선택이었고,

빛나는 하루였을 것이다.



슬퍼했던 모든 것들도

언젠가 문득

마음에 실린 초록 한 조각으로

다시 올지 모르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의미,

아직 다 전하지 못한 마음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



그러니 기억해 다오.



내 삶이 한때

당신의 오늘을 밀어 올렸을지도 모를

희망 한 알이었다는 것을.



사람이여,

당신의 밤이 깊어갈 때,

한 줌의 흙을 떠올려라.



우리는 서로의 무덤이 아니라

서로에게 꽃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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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가 툭하고 어깨를 건드렸다.


말라붙은 탄식,

발자국 사이에 떨어진

떠나지 못한 꿈의 조각들


잊은 듯

바람 주머니에 실려 다니는

스스로를 풀어야만 하는

존재의 매듭.


불현듯 알 수 없는 위로를 받고

한숨을 하나씩 덜어낼 때마다

그 위로의 뿌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풀씨 하나의 장례식에서

퍼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허무라는 말은

우리가 너무 서둘러

붙여버린 이름인지도 모르지.


이제는 알 것 같아.

내 삶이 완성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헛됨은 아니었음을.


풀씨는 꽃이 되지 못한 채 떠나지만

그 안에 이미 모든 꽃을 품고 있으니.


누군가의 오늘을 살게 하는 것,

누군가의 내일에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 내가 존재했던 이유였다면

죽음 또한 하나의 꽃이 아닌가.


그러니 기억해 다오.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이

여전히 어디선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차곡차곡 눌러 담은 추억의

길 끝에서

누군가의 봄을 열어주려 떠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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