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마시며
차(茶)를 마시며
세월이 가니
함께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둘,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어떤 인연은
한 번 식으면 다시 데울 수 없고,
어떤 만남은
식어 버린 뒤에야
비로소 제 향을 드러낸다.
물을 올리고,
차가 우러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일.
손대면 데일 듯 뜨거운 시간도
머지않아 사그라들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막 비운 찻잔의 따뜻함을
얼마나 오래
손바닥으로 붙들고 있었는지,
말없이 창밖을 보다가
잘 지내니
입안에서만 굴리던 말은
목젖 근처에서 맴돌다
그때의 떨리던 입술이
잔 가장자리에 남아
따뜻한 숨과 함께
조용히 빠져 나간다.
햇빛이 기울고,
내 안 어디선가
헛된 기대 몇 개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운다.
한층 가벼워진 숨,
조금 더 둥글어진 시선,
언제든 떠나보낼 준비가 된
빈 잔 하나.
지금 마신 이 향기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가 잠시 빌려 쓰다
돌려줄 수밖에 없는,
뜨거움에서 시작했지만
잠깐 머물렀다
결국 식어가는
느린 시간에 몸을 맡기고,
모든 만남이
영원할 필요는 없다.
어릴 때부터 절에 다녔다.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할머니는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산길을 걸어 절에 가셨다.
이제 그 풍경을 떠올리면, 할머니 얼굴은 흐릿한데 법당에서 피어오르던 향냄새와 절을 둘러싼 울창한 전나무 숲, 피톤치드 가득한 나무 냄새가 또렷하다.
법당 옆 솟아나는 샘가에서는 아낙들이 나물을 씻고 음식을 만들며 초파일 준비를 하느라 수다를 떨며 일하고 있다가 절에서 지내던 어린 나를 보며 “어젯밤 호랑이가 내려왔는데 봤냐?” 하고 놀리던 목소리도 아직 귓가에 남아 있다.
절 마당 이곳저곳에 만국기처럼 분홍 연등이 걸리면 가슴이 콩콩 뛰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할머니 손을 잡고 절에서 며칠 지내던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그 풍경이 아직까지도 선명한 걸 보면 참 신기하다.
그래서 나에게 절은, 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고향집 마당 같다.
그렇게 일찍부터 엿본 스님의 방에서 본 차(茶)가 있는 풍경.
다기(茶器)들을 앞에 늘어놓고 스님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멋스럽게 보였다.
산골이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아홉 해를 오직 한 절로 소풍을 갔다.
유난히 조숙했던 나는 일찍 사춘기가 와 버렸고, 어린 나이에도 어찌나 인생 고민이 많았던지 소풍을 다니던 낯설지 않은 절을 혼자 찾아가곤 했다.
그 절에는 ‘룸비니 학생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어 매주 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들었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108배를 하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연등도 만들었다.
2킬로 남짓한 산길을 걸어 절을 오가던 그 시간의 고즈넉함을 나는 지금도 그리워한다.
여고 시절, 다리를 후들거리며 철야로 천 배의 절을 마치고 느꼈던 뿌듯함과 함께
무엇보다 잊지 못할 건, 여름 수련회 때 월정사에서 탄허스님을 뵈었던 일이다.
새벽 네 시,
법당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문득 서늘한 느낌에 돌아보니
탄허스님께서 미끄러지듯 이동해 법상 위에 앉으셨다.
그리고 스님의 주위를 둘러싼 후광이 보였다.
커다랗고 비눗방울처럼 동그랗고, 약간 노란빛이 도는 진공의 공기 안에 앉아 계신 모습이 너무 신비해서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법문이 시작되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졸려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 가며 눈을 비비며 스님만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법문 시간이 지나가고, 스님께서는 다시 미끄러지듯 법당을 나가셨다.
수련회에 함께 한 친구들에게 그 모습을 봤는지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에 그 뒤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탄허스님이 월정사에서 열반에 드셨고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습골 작업에서 녹두색을 띤 여섯 과, 비취색 다섯 과, 검은색 두 과, 모두 열세 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고요가 커다란 원 안에 모여 있는 듯한 그 빛 속의 탄허스님을 뵌 체험 때문에, 그때부터 승려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지만, 대학 때는 금강경으로 유명하신 교수님이 교내에 계셔서 그분의 특강을 열심히 들으러 다녔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어쨌든 나는 스스로 ‘열심한 불자’였다.
지나고 보니, 스님이 되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고, 어디 한번 꽂히면 ‘금사빠’인 내 성품에 몇 년도 버티지도 못하고 환속(還俗)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웃거리게 된 스님의 방,
그곳에서 처음 본 차(茶)가 있는 풍경.
작은 다기(茶器)들 앞에 앉아 있는 고요한 풍경이 좋아서 차(茶)를 배웠다.
지금도 시간을 조금 느리게, 여유 있게 흐르게 하고 싶을 때 나는 차를 마주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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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 전쯤, 여고생들의 차(茶) 동아리를 지도하면서 그 풍경에 다시 한번 빠져들었다.
고운 한복을 입고 느린 동작으로 차를 우리고 따르는 아이들의 손짓은, 그야말로 아름 다운 한 편의 시 같았다.
스님들이 만드는 차의 풍경과, 곱고 예쁜 아이들이 만드는 차의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한쪽은 깊게 가라앉은 명상의 색이었다면, 다른 한쪽은 갓 우려낸 떫떠름하지만 신선한 연둣빛 녹차 같았다.
원래 엉뚱함이 출중한 나는 그 풍경 안에 아들도 한 번 넣어 보고 싶어졌다.
고3, 입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던 아들을 억지로 꼬셔 차(茶) 선생님 댁에 2박 3일 동안 숙식, 그리고 평일 일주일을 속성 차(茶) 과외를 시켰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청소년 차문화 대전에 출전.
대회장에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남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옥색 도포를 입고 차를 우리는 아들의 모습은 내 눈에는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나 혼자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대는 동안, 손을 바들바들 떨며 차를 우리던 아들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엄마의 엉뚱한 요구에 말려 팔자에도 없는 차(茶) 대회에 끌려나간 꼴이니 웃기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날이 아들에게 작은 추억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언니가 내게 ‘시(詩) 학대범’이었다면, 나는 아들에게 ‘차(茶) 학대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전이쥬?
오늘은 그때 상으로 타 온 다기(茶器)에 추억을 담아 차 한 잔을 우리려고 한다.
스쳐 지나간 인연들과 이루어지지 않은 꿈들,
그리고 아직은 주저앉히고 싶은 나만의 느린 시간을 천천히 마셔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