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안개
살다 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생각은 터널 속 선로처럼
한 줄로만 뻗어있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아
끝내 서로를 건너지 못한 채,
하나둘 섬처럼 멀어진다.
섬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누가 나를 사랑했는지,
누가 먼저 떠났는지,
분명 함께 서 있던 자리였는데도
기억 속 사진에는
늘 혼자만 남아 있다.
과거의 노력도,
미래의 가능성도,
한순간의 실패 앞에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때,
내가 사라져야
세상이 편해질 것만 같은 날.
모든 것이 막막해질수록
세상이 통째로 지워진 듯,
꿈속에서조차 자꾸만 길을 잃고,,
익숙하던 골목이 막다른 길로 막아서
아는 얼굴들은
신호음처럼 깜빡거리다가
갑자기 로그아웃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결국 나 자신을
끝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시간.
마음의 밑바닥에서 마주친
진짜 얼굴은
스스로를 탓하는 말들이 끝없이 밀려와
변명할 여지도,
남을 탓할 힘도 사라진 순간에
바깥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재판장이
심문하듯 나 자신을 앉혀 놓고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 질문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
마음의 바닥에 닿아 보면 알게 된다.
거기에서 만나는 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 했던 것과
저지른 잘못들이 아니라
끝까지 버리지 못한 사랑의 목록이다.
그래서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길을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듯,
다시 한번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갇힐 때면, 아직도 화면의 잔상이 선명한 영화 <미스트(The Mist, 2007)>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동명 중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아 2007년 제작된 미국의 스릴러 영화이다.
‘보이지 않는 괴물보다 두려움에 휘말린 인간이 더 무섭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독한 안갯속에서 사람들은 마트 안에 고립된다.
전화도, 전기도, 모든 연락 수단이 끊긴 채 ‘밖에는 무언가 있다.’는 불안만 짙어간다.
그 불안은 곧 집단 히스테리와 광신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괴물보다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결국 주인공 데이비드는 더 이상 마트 안에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들 빌리와 이웃, 노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마을을 탈출한다.
밖은 괴물에게 당한 시체들로 가득한 생지옥이다.
군대조차 패배하고 철수한 듯 보이고, 괴물들에 초토화된 세상에서 도망칠 곳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기름은 떨어져 가고, 살아남을 희망까지 사라진 순간,
데이비드는 차 안 사람들끼리 고통 없이 끝내자는 선택을 한다.
총알은 네 발.
사람은 다섯.
데이비드는 아들을 포함한 네 사람을 자기 손으로 쏴서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괴물에게 잡아먹히든, 죽음을 홀로 감당하겠다며 총알 없는 총을 들고 절규하며 차 밖으로 나온다.
잠시 후,
괴물이 아니라 군대 차량들의 행렬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군인들은 괴물들을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오고,
트럭 위에는 다른 생존자들이 타고 있다.
초반에 “아이를 찾겠다”며 혼자 안갯속으로 사라졌던 여자도 살아 있다.
구원이 막 도착한 직후,
데이비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이다.
진짜 공포는 괴물인가,
아니면 두려움에 휘말린 인간의 선택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을 너무 빨리 확정해 버릴 때
우리는 어떤 비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가.
원작과 다른 결말로도 유명하지만, 영화판 결말이 훨씬 더 잔인해서 그만큼 오래 씁쓸함으로 남아있다.
영화 미스트(The Mist)를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 괴물보다 앞이 안 보인다는 공포가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가 생각하게 된다. 안갯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결국 가장 사랑하는 이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선택까지 하게 된다.
자욱한 안개에 갇힐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나는 것은,
안개가 걷히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이미 저질러버린 끔찍한 선택들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눈앞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끔찍한 결말이 이 영화를 진짜 스릴러이자 비극으로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
우리는 세상을 보기보다 먼저
자기 안의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마음의 밑바닥에서 만나는 얼굴이
끝내 놓지 않았던 사랑과 희망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