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2
안개 2
앞산이 보이지 않는다.
발밑의 길만 손바닥만큼 젖어 있을 뿐,
매일 보던 능선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젖은 흙냄새를 안고
새벽마다 기지개를 켜던 나무들이
어디까지 물러난 것일까.
서로를 스쳐 간 발자국들만
젖은 바닥에 잠시 찍혔다가 이내 지워진다.
안개가 모든 윤곽을 삼키는 날에는
불안한 뉴스와 근거 없는 추측이
발자국마다 작은 구멍을 내며 걸어 나온다.
조금씩 대답을 미루고,
조금씩 진심을 숨기고,
조금씩 상처를 감추다 보면
어느새 산과 산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계곡처럼
깊고 넓은 거리가 생긴다.
누구도 자기 가슴 안에서
무엇이 가라앉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마음의 가시거리 안쪽에
부끄러움,
수치심,
수없이 무너지고 싶었던 날들.
보고 싶었으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세상이 먼저 나를 지워버린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불안은 사실 ‘미래’라는 이름을 빌린 안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정작 현재의 발밑의 길조차 보지 못한 채 허공만 더듬게 된다.
불투명한 내일에 대한 공포가 커질수록,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내 발을 적시는 흙, 새벽마다 기지개를 켜던 나무들의 온기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마음의 날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뉴스와 소문, 근거 없는 말들이 마음속 가시거리를 점점 좁혀 놓을 때, 우리는 ‘무엇이 올지’만 몰두해 바라보느라 ‘이미 와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미래의 그림자가 너무 커져 지금의 윤곽을 지워 버리는 셈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그 불안에 흔들리다 보면 자기 자신부터 희미해져 간다.
믿을 수 없는 세상
믿을 수 없는 사람만 생각하다
정작 나를 둘러싼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끝내 보지 못한 것들이 세상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지워 나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갯속에서도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 보이지 않는 산을 찾기보다, 먼저 고개를 내려 발밑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직 젖어 있는 길, 스쳐 간 발자국, 누구도 말하지 않는 가슴속의 가라앉은 것들.
불투명한 미래만을 응시하느라 흐려진 지금 이 순간의 얼굴을 다시 확인해 보는 일,
어쩌면 그 작은 응시가 불안을 견디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의 죄가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이 수증기가 되어
하얗게 피어난 얼굴.
보이지 않는 길의 전부를 걷지 못하더라도,
어디선가
같은 안갯속을 걷고 있는 누군가가
보내오는 구조신호를 향해
아주 느리게,
한 발짝씩만 걸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