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차
꽃차
혼자 있는 오후는
대개
너무 길거나 너무 짧다.
주전자에 물이 끓어오를 때,
수도꼭지 밑에 엎드려 있던
날것의 하루가
조금씩 데워지는 것 같다.
한때 봄의 심장으로 뛰었을
그 작고 뜨거운 삶이
주름진 몸을 풀어
찻잔 안에서 다시 피어난다.
절정의 순간을 접어 말려 두었다가,
뜨거운 물 위에 펼쳐 보이는
시간의 잔상.
사라지는 것들만이
기억하는 길이 있는 듯,
가늘고 흐릿한 선 몇이
천천히 허공을 그어 나간다.
끝난 줄 알았던 삶이
다시 피워 올린 이름 없는 봄.
언젠가 나도 이렇게 말려져
누군가의 오후에
한 번 더 피어나리라는
막연한 희망과 닮았다.
찻물을 다 비우고 나면
잔 바닥에 남은 것은
몇 개의 꽃줄기와,
아직 설익은
흐릿한 생각뿐.
나는 그 생각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킨다.
그 사이로
사소한 근심 몇 개가 조용히 건너가고
흩어진 향기가 건네주는 희미한 위로가
가슴 안쪽을 적신다.
혼자 있는 오후는
더 이상 쓸쓸함이 아니다.
여러 가지 꽃을 따서 꽃차를 만들어보았다.
국화차에서는 국화꽃향기가 나고 메리골드꽃차에서는 메리골드 꽃향기가 난다. 당연한 일 같지만, 그 당연함이 마음을 오래 붙든다.
말라서 빛이 바래고, 모양이 조금 일그러져도 꽃은 끝내 자신의 향기를 버리지 않는다.
찻잔 위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다 생각한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의 삶도 저러하리라.
뜨거운 물을 부으면 꽃은 죽음을 털고 한 번 더 피어난다. 꽃잎은 천천히 풀어지면서 자신을 물속에 풀어 넣는다.
가장 절정이었던 때를 접어두었다가, 죽음 후에야 조용히 펼쳐 보이는 일. 그 모습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어느 날 문득 향기로 떠오르는 순간과 닮아 보인다. 그때는 힘들어 허우적거렸던 날들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상하게도 은은한 추억으로 남은 기억들처럼.
꽃차를 마시는 오후는, 사실 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우리고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국화는 국화의 향으로, 메리골드는 메리골드의 향으로 우러나듯, 나 역시 내 삶 밖으로 우러날것이다. 누구의 인생을 흉내 내어도 결국 배어 나오는 것은 내가 겪어온 계절들의 냄새일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어떤 향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묻게 된다.
찬찬히 우러난 차를 마시고 나면 찻잔에 남은 몇 개의 줄기와 꽃잎은 화려한 색은 이미 흩어졌고, 남아 있는 것은 본래의 뼈대 같은 것들뿐이다. 사람도 결국 이렇게 남을 것이다. 말과 행동, 관계 속에서 흘려보낸 향들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 스며들고, 마지막에는 어떤 골격 같은 한두 가지로만 떠오르겠지.
그 뼈대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의 말과 행동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혼자 마시는 꽃차 한 잔이 쓸쓸함 대신 위안이 되는 이유는, 사라진 것들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잠시나마 되찾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삶은 늘 다른 모양으로 말려지고 우러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이어진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오후에 작은 향 하나로 잠깐 피어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차(茶)가 된 꽃처럼 내가 그려가는 내 삶의 무늬도 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