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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Mar 01. 2024

청룡이여, 영원하라!

LG 트윈스 2023년 우승을 맞아 추억하는 MBC 청룡

2024년 3월 25일, 월간 웹진의 형태로 돌아오는 월간 장르불문!

살짝 맛보시겠습니까?

신년호 특집으로 보내드린 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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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


2023년 11월 13일, 한국보다 8시간 느린 네덜란드의 흐린 아침. 모닝커피를 마시며 무심히 인터넷 포탈 뉴스를 스크롤 하는데, 헤드라인 한 줄과 사진 한 장이 내 눈을 확 붙잡았다.


<LG트윈스, 29년 만에 대망의 한국시리즈 우승!>


잉? 이게 무슨 소리야? 엘지가 우승?? 그 약체 엘지가 우승을 했다고? 이게 무슨 한낮에 고양이 하품하는 소리인가 싶어 바로 검색하니 우승의 순간을 담은 관련 영상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2023년 KBO 한국시리즈, LG 트윈스 대 KT 위즈. 총 7차전 중 엘지가 3승 1패로 앞서는 가운데 우승을 결정지을 대망의 5차전. 9회 초에 스코어는 6 대 2,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투 볼. 아웃 하나면 우승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선수, 코치, 관중들의 땀방울이 슬로우모션으로 뺨을 따라 흐르고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대지를 뒤흔든다. 타자가 친 공이 1, 2루 사이로 날아가 2루수의 글러브 속으로 가볍게 안착하는 순간, 잠실야구장은 말 그대로 뒤집어진다. 관중의 엄청난 함성 속에 불펜에 있던 선수들이 우르르 필드로 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포효하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껑충껑충 뛰며 승리의 기쁨을 나눈다. 알록달록 밤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놀이. 퍼벙! 퍼버벙! 퍼버버벙! 유광 점퍼를 입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엉엉 우는 골수 팬들의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화면 너머 그대로 전달되는 흥분, 감격, 벅참. 그제야 실감한다. 우와, 진짜 엘지가 우승했구나. 그것도 29년 만에.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찡해지고 눈 끝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나도 엘지 팬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29년 전, 즉 1994년, 난 대학 3학년이었고, 분명 어느 호프집에서 이들의 우승에 미친듯이 방방 뛰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기억이 흐릿할까? 벽 모서리에 걸린 16인치 텔레비전과 적황색의 다이아몬드 벽지는 기억나지만 그 밖의 것들은 가물가물하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너랑 있었니? 친구는 자긴 야구의 ‘야’자도 모른다며 아닐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난 누구와 어깨동무를 하며 목청 터져라 ‘무적 엘지’를 외쳤을까? 그 호프집은 신촌이었을까, 대학로였을까? 이 기억은 머릿속에서 조작된 걸까? 한때 야구광이었던 내가 무엇 때문에 야구와 멀어져서 이 결정적인 순간에 ‘흐린 기억 속의 야구’를 부르는 걸까? 새삼 29년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며 난 아련히 노스탤지어에 빠져들었다.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LG 트윈스의 전신이 프로야구 원년 구단 중 하나인 <MBC 청룡>이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군사 정권 아래 탄생한 프로야구. 이미 고교 야구에 푹 빠진 초등 3학년 키 작은 소녀였던 내게 프로야구는 그 탄생 배경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저 신기하기만 한 대형 사고였다.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전이 열렸고, 여섯 구단(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스,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 그리고 MBC 청룡)이 모두 모였다. OB 베어스의 윤동균 선수가 선서를 했고 전두환이 시구를 했다. 개막전 경기는 삼성 라이온즈 대 MBC 청룡이었는데, 10회 말 연장전에서 이종도 선수의 만루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청룡의 힘을 목격한 난 주저 없이 청룡 팬이 되었다.


여러 이유로 난 청룡을 좋아했다. 공 열 개 중 4개의 안타를 친다는 백인천 감독이 있었고, ‘개구리 번트’의 주인공 김재박 선수가 있었고, 연고지도 내 고향 서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구단 이름이 한자인 게 매력이었다. 다들 ‘라이온즈’니, ‘타이거스’니, ‘베어스’니 영어로 이름 짓기 바빴는데, ‘블루 드래곤즈’가 아닌 청룡이라니, 이 얼마나 독야청청 빛나는 이름인가! 하여, 때 아닌 한국어 사랑을 내세우며 난 청룡의 어린이 회원이 되었고, 커서 청룡 선수와 결혼할 거라며 테니스 공으로 투구 연습을 했고, 투수하면 하기룡, 타자하면 백인천, 유격수하면 김재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투수하면 박철순, 타자하면 장효조라고 하는 대다수의 친구와 싸워야 했다.)


KBO 리그 1호 승리 팀의 영광을 차지한 청룡이지만 그 이후는 순탄하지 않았다. 준우승을 한 84년을 제외하면, LG 트윈스로 전환된 89년까지 4-5-3-6-6-6위에 머물렀다. 개인의 실력이 뒤지지 않았음에도 전략이 탄탄하지 못했고 잦은 감독 교체 때문에 팀이 뭉쳐치지 않았다. 결국 오랫동안 야구단 창단을 노렸던 럭키 금성, 즉 LG그룹에 매각됐다. 여의주를 물고 속절없이 날아간 청룡의 자리에 응애응애 쌍둥이들이 태어났다. LG 트윈스로 환골탈태한 후 이들은 바로 90년도에 우승을 차지했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인 건가? 뛰자마자 하늘에 닿아버린 이들의 머리 덕분에 한동안 주춤했던 내 야구 사랑도 다시 피어났다. 하지만 그 영광도 오래 가지 못했으니, 94년 우승 이후 암흑기로 들어갔다. 6-6-6-8-5-8-7-6-6-7. 마치 전화번호 같은 이 숫자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팀 성적이다.


창피하지만 인정한다. 내가 야구와 멀어진 이유는 결코 이들의 성적과 무관하지 않다. 성적에 대한 실망이 계속되자 내 사랑은 식어버렸고 더불어 야구 자체를 향한 사랑도 시들해졌다. 이제는 구단이 8개인지 10개인 지도 모르고 구단 이름도 모른다. 선수 이름도 알 리가 없다. 그나마 기억하는 이름은 추억의 강투수 염종석과 ‘양신’ 양준혁 정도다. (어, 어찌하여 롯데와 삼성 선수인가?) 결국 난 LG 곁을, 아니 청룡 곁을 지키지 못하고 떠났다. 삶이 바빠 ‘자연스레’ 멀어졌다는 지루하고도 성의 없는 핑계를 대며. 하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밤 하늘의 별이 안다. 결코 자연스레 멀어진 게 아니라는걸. 못하니까 속상하다며 떠나버렸다는 걸.


난 우승 영상을 계속 돌려 봤다. 약골이었던 이들이 언제 이렇게 강팀이 되어 우승을 거머쥔 걸까? 시상식에서 감독과 선수들은 29년을 기다려 준 팬들의사랑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오랜 세월 팀의 굴곡을 지켜보며 입에 욕을 달고 저주를 퍼부을지언정 끝까지 곁을 지킨 골수 팬들. (그들은 이구동성 MBC 청룡 때부터 팬이었다는 걸 강조한다.) 배신한 팬인 난 그들의 환호 앞에서 그만 온몸이 구깃구깃 쭈글어들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이건 내게도 적용될까? 원하는 성적을 이루지 못하면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식어버릴까?


고백하건데, 영상을 보던 이때, 나에 대한 사랑은 꽤 식어 있었다. 2023년을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지만 끝자락에 선 내 모습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에 따른 지독한 허무와 무기력에 시달렸다. 어떤 모습을 바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 50세라는 현실에 마음은 조급했고,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우승의 모습이 아니었다. 열심히 달린 만큼의 대가가 충분치 않다고 느낀 걸까? 스스로 매기는 내 성적은 흑역사로 남아 있는 청룡과 LG의 성적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불꽃놀이와 세리머니는 계속됐다. 29년 만에 이룬 우승이니 얼마나 달까? 아니, 그저 사탕처럼 달기만 할까? 그간의 좌절과 고생과 수치를 생각하면 이 달콤함은 쓴맛을 동반하는 다크 초콜릿 맛일 것이다. 스포츠 팀의 흥망성쇠에 자신을 투영하는 게 유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우승은 다음은 당신 차례라고, 언젠가 당신도 이렇게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네는 초콜릿 같았다. 난 기꺼이 그 초콜릿을 받았다. 엘지, 아니 청룡이여, 영원하라! 배신한 이 부끄러운 팬을 용서하소서.


2024년이 청룡의 해라고 한다. 자연스레 MBC 청룡이 떠오른다. 강팀으로 시작했으나 우승 한 번 못 하고 사라진 비운의 팀. 그 팀이 좋다며 주말마다 티브이 중계를 챙겨 봤던 옛날의 나도 떠오른다. 야구를 좋아했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 청룡의 명맥을 이은 LG가 29년 만에 간절함을 이루었듯,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도 적시타, 혹은 극적인 홈런으로 간절함을 이루시기를 두 손 모아 빌어 본다. 그리고 성적과 관계없이 곁에서 29년을 지킨 골수 팬처럼, 당신도 당신의 골수 팬이 되어 굳건히 옆을 지킬 수 있기를. 나도 내 골수 팬이 될 수 있기를.


3월이면 KBO 2024년 시즌이 시작된다. 시차 때문에 경기는 못 보겠지만 최소 경기 결과는 챙겨봐야겠다. 그러려면 우선 구단 이름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SSG는 '랜더스(Landers)'고 KC는 '다이노스(Dinos)'라고? 키움은 ‘히어로즈’고, 해태가 KIA로 바뀌었군. 즐거운 공부가 될 것이다.


P.S: 구독자분 중 LG 팬과 청룡 팬이 얼마나 계실지, 또 프로야구 원년의 흥분을 추억하는 분이 계실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야구 이야기를 나눠 주세요. 그리고 건방지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한화 팬분들, 힘내세요! LG도 이루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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