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현 Dec 04. 2018

우리들의 부끄러운 선의(善意)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책 리뷰

 착하기만 해선 살아남기 어려운 각박한 세상이지만, 굳이 나쁜 쪽보단 착한 쪽에 서고 싶은 건 누구나 비슷한 바람일 것이다. 나도 성인군자처럼 고결하게 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천국의 문턱도 글렀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윤리의식은 갖고 살자는 주의다.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 것,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것,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보탤 것과 같은 진부하지만 보편적인 윤리들. 그 뻔한 다짐들만이라도 지켜 낸다면 그래도 좋은 사람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강민호'가 아는 교회 동생에 불과했던 '종수'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받아들인 것도 그 정도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황은 자세히 몰라도 어려움에 빠진 타인을 돕고 보는 게 인간이라면 으레 가지는, 혹은 가져야 할 당연한 윤리니까. 또한 그는 한때 견실한 청년으로 집사님들께 인정받고, 교회 동생들마저 줄줄이 따랐던, 착한 ‘교회 오빠' 강민호였으니까. 그렇게 강민호는 종수의 여자 친구이자, 역시 한 때 교회 동생이었지만 이젠 히잡을 쓰고 다니는 '윤희'를 설득하기 위해 종수와 잣나무 숲으로 향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비슷하게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소설 속 강민호처럼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윤리를 실천해야 하는 순간애 갑작스레 내던져진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람이면 쉽겠지만 문제는 내 삶의 반경에 없었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종수 같은 사람이 불쑥 나타나 도움을 청할 때다. 세상 착한 사람들은 다 내버려두고, 왜 굳이 나인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한밤의 불청객처럼.


출처 : Pixabay

 

그래도 사람들은 결국 ‘선의’를 선택한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우연히 내던져진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만 삶의 의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내가 그런 것처럼 누구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써 더 읽지 않아도 된다. 내 글은 하이데거만큼이나 장황하니까...) 한 때의 꿈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겨우 살아내기 바쁜 우리지만 ‘착하게 살자’는 알량한 소신만이라도 지켜낸다면 삶의 마지막쯤에 가서, 이렇게 살다 보면 그게 조만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게 살았다’고 위안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는 게 인간이니까. 문제는 가혹한 세상은 인간의 그 소심한 소신마저도 굽히게 한다는 거다. 윤희와 종수를 도우려는 선한 마음으로 잣나무 숲에 향했던 우리의 착한 강민호는, '제가 고마워해야 하냐는',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윤희의 날 선 대답만을 듣고 패잔병처럼 쫓기듯 급히 P읍을 빠져나온다.


 이기호의 단편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의 ‘착한 사람들'은 모두 처절하게 실패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에서 '권순찬'은 그의 딱한 사정을 돕고자 동네 주민들이 마련한 성금 700만 원을 거절하고, <한정희와 나>에서 '한정희'는 '나'의 애정 어린 보살핌 따윈 개나 줘버린 듯 학교 폭력 가해자가 된다. 착한 일을 했던 인물들의 패배는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기지만, 그보다 이 소설이 불편한 진짜 이유는 저마다의 석연치 않은 ‘패인(敗因)' 때문이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처럼 이기호는 그들의 선의가 실패한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다. 오늘 하루도 착하게 살았을 독자들에게.


선의란 탈을 쓴 이기심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에서 권순찬은 사채업자에게 부당하게 뜯긴 돈을 받고자 G시 아파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착한 사람들'로 대변되는 아파트 입주민들은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 입주민들은 권순찬에게 '아파트 지하 주차장 청소 일을 소개' 시켜주고, '김치도 몇 번 갖다'주며 그를 돕는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사채업자를 찾는 데는 무관심하다. 그들이 바라는 건 권순찬이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아파트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5개월째 단지 앞 야산에 숙식하며 시위를 이어가는 권순찬의 사정은 비록 '딱하지만',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는' 사정에 불과하다. 입주민들은 겨울이 오기 전 권순찬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은다.


출처 : Pixabay

 

큰 재난과 재해에 의해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성금을 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큼이나 확실한 도움은 없으니까. 그러나 때로 우리 사회는 성금을 인질로 삼는다. "그 정도 돈을 받았으면 됐지 않냐"며 아직 슬퍼하는 자들의 입을 가로막는 장면을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그때 우리가 낸 성금은 누군가를 도우려는 진심 어린 선의였을까, 아니면 '안타깝지만 성가신' 것들을 눈 앞에서 빨리 치우려는 이기심의 발로였을까. 입주민들의 '그 모든 선의'가 담긴 성금을 거부한 권순찬은 누군가는 값을 치렀을 건장한 청년 두 명에 의해 끌려가 G시 아파트에서 사라진다.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은 욕망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민호는 잣나무 숲에서 윤희를 기다리며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심 망설인다. 이내 그가 맘을 다잡기 위해 떠올린 건 청년 시절 교회 부흥회에서 경험한 산상기도였다.


그날, 산상기도에서 나는 백 년도 다 되어 보이는 낙엽송을 끌어안은 채 기도를 드리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순간 내가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와, 고통을 받았던 선조들과,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중략) 삶의 모든 의미들로 가득 차 있던 시간들... 그러자 내가 지금 이곳에 왜 와 있는지, 누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알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 265p


 민호에게 타인을 돕는 건 '백 년도 다 되어 보이는 낙엽송을 끌어안은' 경험만큼이나 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에 '살아갈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그가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비롯된다. 민호의 선의는 근본적으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선한 행동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진지한 연민이 부재한 선의는 단발적이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애초에 P읍을 방문했던 것도 원래는 작은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심과 '윤희의 얼굴이 보고' 싶은 욕망에 못 이겨 급작스런 종수의 부탁을 얼떨결에 받아들인다. 작중에서 민호는 과거 윤희에게 연정을 품었지만 결국 상처만 주고 끝나 버린 관계로 암시된다. 그럼에도 그가 '뻔뻔하게'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건, 그가 그 사건을 '아예 기억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은 민호 같은 사람에게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자기 방어기제다.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어 온 자는 자신의 선함이 부정되고 정체성이 통째로 흔들리는 사건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민호의 '자폐적' 선의는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윤희에게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가 가진 선의가 그저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은 우리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진짜 선의일까? 어쩌면 <누구보다 착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인간의 선의가 실패하는 서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선의의 거짓성을 고발하는 서사 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편한 진실 앞에 민호는 '그냥 두 눈을 감아'버리고야 만다.


선의의 폐허 속에서도


 앞선 이야기들이 선의란 가면 뒤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다면, 소설 마지막에 수록된 <한정희와 나>는 선의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 아니었는지 묻는다. 작가인 ‘나’는 항상 '불량스럽기만' 하던 아내의 이복 오빠가 사기죄로 수감되자, 갈 곳 없는 그의 딸 ‘한정희’를 집에서 당분간 돌보기로 한다. 정희가 온 첫날, '열두 살이 된 소녀가 낯선 곳에 자신의 짐을 푸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슷한 고초를 겪은 아내의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동일한 경험을 가진 아내를 매개로 정희에 대해 깊이 연민하며,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세심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나'가 정희에게 보여주는 선의는 소설 내 다른 주인공들의 그것과는 달리 훨씬 사려 깊으며, 무엇보다 진실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학교 폭력 주범자가 되고 아이를 구제하려 피해 학생의 어머니를 홀로 찾아간 나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황망히 '그 자리에 서 있'던 그가 느낀 건 모욕감도, 분노도 아닌 좌절감이다. 작가로서 믿어 왔던 이상적 가치관이 현실 세계에 의해 무참히 깨어질 때 비롯되는 좌절감.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란 어느 영화의 대사를 떠올려본다. 영화보다 더 유명해져 버린, 내 밥그릇 챙기기 바쁜 현대 시민들의 도덕률이 된 그 일갈을. 그렇게 생각하면 정희도 호의를 둘리로 생각한 나쁜 계집애였다고, 도대체 그런 막되 먹은 아이를 왜 집에 들였을까, 분노하고 잊어버리면 될 일이다. 선의란 건 애초부터 절대적인 윤리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호혜적 관계가 전제되었을 때만 유효한, 그래서 각박한 오늘날 사회에는 맞지 않는 낡은 관습에 불과한 건 아닐까. '착하게 살자'는 다짐만큼 비웃음을 사는 것도 없으니.


 하지만 그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정희가 떠난 후 '나'에게 남는 건 분노와 냉소가 아닌 후회와 부끄러움이다. '내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과 해서는 안 되는 말들'에 대한 부끄러움, 정희를 이해하지 못했고 정희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 '나'는 이기호가 독자에게 물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 이 소설집의 유일한 주인공이다. 왜 내 선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실패 그 자체는 우리를  단련시키지 않는다. 자신의 위선에 눈 감아 버린 ‘민호’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나’처럼 실패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비로소 나아갈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다. 윤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윤리도 실패한다. ‘빌어먹을’ 현실 세계에서 ‘나’의 선의는 부서졌고, 앞으로도 또 부서질 테지만, 그 무참한 폐허 속에서도 ‘나’는 묻는다.


"이렇게 춥고 뺨이 시린 밤, 누군가 나를 찾아온다면,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때 나는 그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때도 나는 과연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 괴로운 회의 속에서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본다. 우리가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이기호 -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매거진의 이전글 어깨에 힘 빼고 씁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