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영화 리뷰
한눈에 보기에도 자그마한 소년이 두 손목에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선다. 그러나 재판정에 불려 간 건 그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를 제기한 원고다. 피고는 그의 부모님. 출생증명서도 없어 치아로 나이를 추정해야 하는 주인공 '자인'은 자신에게 불행한 삶을 물려줬다며 부모를 고소한다. 영화는 자인의 삶과 법정의 변론 장면을 교차하며 전개된다.
12살 소년의 삶은 '출구 없는 노동', 그 자체다. 자식들을 돌볼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부모를 대신해 자인은 자신의 몸보다 큰 가스통을 배달하고 도로 한편에서 동생들과 주스를 판다. 소년이 거친 길거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다. 한없이 영악해지는 것. 그래서일까, 자인이 내뱉는 거짓말과 욕설들은 상스럽기보다 씁쓸하다. 그런 소년에게도 여동생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다. 어느 아침,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의 이불에 묻은 옅은 피를 보고 불길함을 직감한다. 자인은 사하르와 떠나려 하지만 끝내 부모는 여동생을 동네 슈퍼 주인과 강압적으로 혼인시킨다. 자인은 지옥 같은 집을 박차고 나온다.
아무리 노련한 소년도 몇 날 며칠을 거리에서 살아남긴 어렵다. 정처 없이 배회하던 자인에게 유일하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건 자인만큼이나 살얼음판인 하루하루를 보내는 불법 체류자 라힐이다. 미혼모에 체류증도 가짜인 라힐은 외출할 때면 까만색 점을 볼에 칠해야 한다. 혹시 모를 단속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출생증명서 없는 자인, 체류증 없는 라힐, 라힐의 아들 요나스가 함께 꾸려가는 일상은 남루하지만 빛난다. 손님이 먹다 남은 케이크를 라힐이 몰래 집으로 가져와 함께 초를 부는 장면은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는 증명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밀어낸다. 증명될 수 없는 그들의 가족도 대상이다. 라힐이 단속에 걸려 수감되면서 단란했던 생활은 파괴된다.
영화는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가 역설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비춘다. 홀로 남은 자인은 요나스를 먹일 음식을 얻고자 난민 구호 단체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난민임을 증명하는 '난민증'을 요구한다. 법과 제도의 안정적이고 투명한 운영을 위해서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함을 모르지 않는다. 극 중에서 계속 언급되는 '서류'는 바로 그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시 요구하는 그 '최소한'마저도 버거운, 그래서 법과 제도 바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자라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은' 자인이 그렇다.
자인의 불행에 대한 책임은 그의 부모뿐 아니라 사회에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소년의 부모가 출생 증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손 쓸 수 없었던 게 아니냐고. 그러나 소년이 그 숱한 날들을 거리에서 배회하는 동안 아무도 소년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사회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했다. 무관심 혹은 외면이 때로는 살인자 없는 살인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소년이 죽지 않았던 건, 이게 영화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현실은 영화보다 비참하다.
자인을 부른 건 영화다. <가버나움>은 놀랍게도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난민들을 베이루트에서 직접 캐스팅했다. 자인 역의 배우는 실제 자인이란 이름의 시리아 난민 소년이다. 영화던 연기던 그것의 가치를 떠나 모두 허구의 산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잘 모르겠다. 자인의 연기 자체는 허구일지 모르지만, 스크린 너머에서 우리는 시리아 소년의 실제 삶을 마주한다. 촬영이 끝난 후 자인과 가족들은 실제로 망명이 허용되어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가버나움>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유는 작품성 때문만이 아니다. <가버나움>은 사회가 방기 했던 일을 대신했다. 이름 없는 존재들을 부르는 행위를.
때로 부름은, 그 자체로 구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