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계획은 잘 모르지만
서울 시내에서 세운상가만큼 오랫동안 논란이 되는 건물은 없을 것 같다. 지어진 지 50여 년, 세운상가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며 모순적이다. 대한민국 제1호 주상복합건물인 동시에 한국 최악의 현대건축 18위인 건물, 국내 최고의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설계했음에도 도심 생태계를 망친 주범으로 통하는 건물, 전자 산업의 메카라는 찬란한 과거는 온데간데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비루해져 버린 건물. 2019년인 지금까지도 재건축과 철거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세운상가에 다녀왔다.
세운상가의 인상은 세간의 말들과는 달리 깔끔하고 한적했다. 상가를 들어가 바로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종묘를 지나 인왕산까지 탁 트인 뷰는 환상적이었다. 서울 시내, 특히 강북에서 이런 뷰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옥상에서 내려가니 오피스텔 같은 주거 및 사무용 공간이 나왔는데 중정처럼 가운데가 뚫려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거주의 질보다는 밀도가, 공적 공간보다는 사적 공간이 중시되는 국내에서 중앙이 트인 거주 공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무로 된 난간과 오래된 바닥 타일에 천장에서 내려온 따뜻한 빛이 살포시 쌓여 빈티지한 느낌이었다. 한국이라기보다 옛날 홍콩 영화의 주윤발이나 장국영이 나오면 잘 어울릴 공간이었다.
집집마다 대문 옆에는 <ㅁㅁ전자> 같은 현판이 꽤 붙어 있었다. 아직도 이곳에 숨 쉬는 산업이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정말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상가 어귀에서 음악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음악을 쫓아가니 한 아저씨가 어슬렁 거리고 계셨는데, 호기심에 한 두 마디 나눴다가 갑자기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신다고 해서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진공관 오디오 연구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사무실 한쪽에는 부품들이 담긴 서랍으로 빼곡했고, 그 위로는 한 사람이 평생 딸 수 있을까 싶은 특허증들이 줄 지어 걸려 있었다. 사무실 내부는 세운상가의 역사만큼이나 낡고 복잡했는데 창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지저분하기보다는 오히려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저씨는 아저씨라기보단 할아버지에 가까운 분이었다. 희끗한 머리, 옅게 보이는 검버섯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60대 중후반쯤은 되었을 텐데 그때는 노화의 흔적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저씨라 부르려고 한다.) 아저씨는 비틀스 LP를 꺼내어 우리에게 <Come Together>를 틀어 주셨는데, 그 순간 새삼 음악만큼은 세상 대부분의 것들과는 달리 잘 늙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비틀스의 음악은 여전히 경쾌했고 이 낡은 공간마저 들썩이게 했다. 세운 상가에서 이런 경험을 한 것은 분명 행운이었고, 이곳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을지로 4가 쪽으로 사옥을 옮긴다고 했을 때, 그런 후지고 아무것도 없는 데로 왜 가야 되냐고 반문하던 직장 동료들이 꽤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기보단 본인들이 갈 만한 깔끔하고 청결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재밌는 건, 그렇게 비루하고 낡은 을지로가 요즘 20대에겐 핫플레이스라는 점이다. 도시 계획의 관점에서는 없애거나 개선해야 할 낡고 오래됨이 반대로 젊은이들에게는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할 새롭고 매력적인 요소가 된다.
세운상가에 대한 철거 계획은 2014년 보류되었지만, 세운상가 일대에 대한 재개발 논의는 지금 시점에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도시 계획과 건축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다. 세운상가 주변의 알짜배기 땅을 잘 개발한다면, 종로 근방 인프라가 훨씬 더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낡은 곳들을 밀어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방문한 세운상가와 현재의 을지로가 그런 것처럼 오래된 공간들만이 주는 매력이 있다. 세운상가의 재생 프로젝트 이름인 '다시 세운'처럼, 재개발 없이도 도시를 다시 세우는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