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미술관에 왜 갈까
"내용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 전시회 카탈로그겠군요." 윌 곰퍼츠가 쓴 <발칙한 현대미술사>(원제 : <What are you looking at?>)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현대 미술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책에 따르면,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조차 작품을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가 많다네”라고 고백할 정도니까. 그러니 누가 황금 같은 주말에 굳이 머리 아픈 현대 미술을 보러 갈까. 미술관이 인기 없는 이유다. 그런데 최근 놀라운 진풍경을 한 미술관에서 목격했다. 사람들이 현대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무려 2개 층에 걸쳐 줄을 서 있었다. MoMa가 있는 뉴욕도 퐁피두가 있는 프랑스도 아닌 서울 복판에서.
마법을 일으킨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영국의 현대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다. 개막 후 3개월 동안 다녀간 관람객만 30만 명. 해마다 천만 영화가 두 세편씩 나오는 영화계에 비하면 "애걔?"라는 말도 나오겠지만, 2018년 기준 국내 영화관 수가 483개인 반면 호크니 전이 열린 서울시립미술관은 단 하나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결과다. 게다가 고흐나 피카소처럼 미술사적 평가가 끝나지도, 광범위한 팬덤도 형성되지 않은 살아 있는 해외 미술가의 전시가 국내에서 이 정도 인기를 끈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전시가 성공한 이유는 뭘까. 매체들은 "호크니의 삶과 작업이 너무 힙해서 힙스터들을 불러 모았다", "살아 있는 최고 비싼 작가이기 때문이다" 등의 다양한 해몽들을 내놓고는 있지만 어느 하나 와닿진 않았다. 당장 '힙함’이나 가격으로 치면 호크니에 뒤지지 않을 마르셀 뒤샹의 전시도 올해 열렸지만 전시장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현대 미술에 무관심하던 대중들이 호크니 전에 열광한 건 왜였을까. 다른 전시들과는 무엇이 달랐던 걸까. 이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이 그림, 진짜 예쁘다”. 이번 호크니 전에서 유난히 들려오던 말이다. 특히 <자연주의를 향하여> 섹션에 있던 호크니 자신의 부모님을 그린 작품 <My parents>(1977)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이었다. 해가 드는 창가 옆, 바퀴 달린 초록색 탁상을 사이에 두고 호크니의 부모님이 각각 앉아 있다. 탁상 위로는 오늘 아침 갓 사온 싱그런 꽃이 꽃병에 놓여 있고, 바닥에는 연보라색 카펫이 깔려 있다.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채 다소곳이 관객을 응시하는 그의 어머니와 브라운 색 정장에 구두를 신고 몸을 수그린 채 어느 도록을 들여다보는 그의 아버지는 노년의 품격을 증명하는 듯하다. 안정적인 구성과 그림 속 서사, 형형하게 뿜어져 나오는 색상의 향연을 즐기다 보면 누구든 호크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는 구글의 아트 앤 컬처(마치 유명 미술관에서 실제 관람하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구글의 서비스다.)처럼 기술을 통해 편안하게 안방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직접 미술관에 간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왜일까.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체력을 들여 미술관에 방문하는 이유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으로 아름다운 여행지를 언제든 체험할 수 있음에도 직접 여행을 떠나려는 이유와 같다. 우리는 예쁜 것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한다. VR 같은 가상 체험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아름다운 것들을 직접 마주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여행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말이다. 작은 모니터 속으로는 호크니의 회화 작품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호크니의 전시를 다녀온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꼭 보러 갔다 와”라고 권유했으리라. 직접 관람할 가치가 분명히 있는 작품이니까.
그렇다면 대개 개념적인 성향을 띠는 일반 현대 미술 작품도 꼭 직접 관람해야 할까? 올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사 상 가장 위대한 변기, 뒤샹의 <샘>을 직접 마주했다. 변기가 작품이 되는, 미술사의 가장 큰 혁명 중 하나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 감흥이 달라지진 않았다. 작품을 정면에서도 보고, 한 바퀴 돌면서도 보고, 한 5분쯤 뚫어져라 보았지만ㅡ난 매사에 열심인 편이다ㅡ 변기의 안쪽 곡선이 서양 배(pear)를 조금 닮았다는 망상을 해보았을 뿐 변기가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뒤샹이 변기를 소재로 택한 것 자체가 대중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미적 즐거움을 철저하게 배제하기 위한 의도였으니, 뒤샹의 전략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뒤샹 이후 현대 미술이 작품이 관람객에게 주는 미적 즐거움보다 작품에 내재한 개념에 치우치면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은 꼭 미술관에서 직접 관람해야 해”라는 필요성을 설득하지 못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미술관이 늘 한산한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팍팍하고 피곤한 평일을 지나 주말엔 그저 편하게 즐기고 싶은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맘이다. 영화로 치면 <기생충> 같은 진지한 영화도 좋지만, 그래도 주말엔 <알라딘>을 보며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잠깐 동화 같은 영화 속 세상에 빠져 보는 것. 호크니가 그린 수영장 그림을 보며 시원한 물속에 풍덩, 하고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거나, 남미의 어느 보석 같은 휴양지의 호텔에 앉아 중정에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는 호크니를 떠올려 보는 것. 사람들이 현대 미술관에는 잘 가지 않으면서, 호크니 전에 열광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러 미술관에 가고, 호크니의 작품들은 정말 아름다우니까. 호크니의 전시를 아쉽게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호크니>를 통해 그를 만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