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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May 25. 2017

가난함에 대하여

  오랜만에 빨래를 했다. 인도 옷은 참 빨리 말라서 좋다. 인도의 숙소는 악명이 높지만 내 마음엔 쏙 들었다. 인도에서는 한국 돈으로 6000원 정도 되는 돈이면 혼자 쓰는 방에서 머물 수 있다. 세네 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에 묵으면 가격은 더 저렴해진다. 부담 없는 돈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인도 여행의 최대 장점 중 하나다. 방 값만큼이나 방은 소박한 모습이다. 차가운 시멘트 벽과 바닥에 어설프게 칠해진 페인트, 가느다란 철골의 침대에 때 묻은 매트리스, 그리고 창 하나가 방의 전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더운 날씨로 인해 천장에는 팬이 달려있다. 작은 탁자나 화장대가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이렇게 소박한 방에 호젓하게 누워있으면 세상을 날 것으로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철문도 잠금장치도, 바람을 막아주는 새시도, 말끔히 도배된 벽도 없다. 그저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런 거친 공간이 나의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준다. 

  혼자 작은 방에 누워있다 보면 그동안 얼마나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홀로 서는 것도 쉽지 않지만 타인과 감정적으로 뒤엉켜 사는 것도 참 지치는 일이다. 외롭거나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하지만 바라나시에서의 열흘만큼은 작은 시도라도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인데도 감정적 무임승차를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하는 타고난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혼자 인도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하듯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툴게나마 끝끝내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계속 내려놓아 만들어가는 가벼운 마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나를 둘러싼 인도의 소박하고 단출한 분위기였는지도 모른다. 

  방값뿐 아니라 음식 값도 저렴하다. 인도에서 한식을 먹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 중 하나인데 그래도 한 끼에 한국 돈으로 2-3천 원 밖에 안 한다. 길거리에서 파는 현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려 한다면 식비에 드는 돈이 급격히 줄어든다. 이렇게 차이나는 물가 때문에 당황스러운 상황도 자주 생긴다. 외국인을 상대로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인도의 장사꾼들에게 흥정을 할 때, 도무지 적절한 가격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물가가 워낙 싸다 보니 우리 상식으로 적당한 가격을 불렀는데도 알고 보면 실제 인도에서 판매되는 가격의 10배 이상을 말해버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뻔뻔하게 인도의 상인들은 “네가 원하는 가격에 주겠다”라고 엄포를 놓지만 정작 관광객들은 오히려 멘붕에 빠지게 된다.

  길가에서 파는 인도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한참 걷다 보면 섭취한 에너지를 그대로 다 사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식은 흙으로 구워 만든 컵이나 나뭇잎 접시에 담겨 나온다. 딱 허기를 달래줄 만큼의 음식과 먹고 나면 곧 자연의 일부가 될 그릇, 그것에 대한 소정의 금전적 대가. 모든 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불필요하게 남는 것이 없다. 잠자리만큼이나 먹는 것도 가볍다. 바라나시의 명물인 요거트 음료 라씨가 바로 흙을 구워 만든 컵에 담겨 나오는데 당황스러운 것은 그 컵이 1회용이라는 것이다. 씻어서 재사용하는 게 아니라 바로 깨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나로서는 어색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견고한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깨어진 컵을 다시 모아 빚어 새로운 컵을 만드는 것일까? 종이컵보다 훨씬 친환경적으로 보였다.

나뭇잎 접시에 담겨 나온 인도의 길거리 음식

    인도는 그렇게 가난한 나라다. 가난한 나라라기보다는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고, 물가는 싼 그런 나라다. 인구 12억 명. 식민지배 당시 수탈과 종교 갈등뿐 아니라 너무나도 다양한 언어와 문화 탓에 단결된 경제개발이 어려웠다. IT분야를 특화해 세계적으로 우수한 기술력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인도 전역의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기란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지역은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공급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그래서 추운 겨울엔 뜨거운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여름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덥지만 에어컨은 쉽사리 만날 수 없는 그런 곳이다. 물질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 같은 사람에겐 참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며 그렇게 불편한 순간은 수 도 없이 많았다. 두루마기 휴지를 구하기도 어렵고, 뜨거운 물은 너무나도 귀했다. 추워도 전기장판과 난로가 없었고, 더워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틀 수 없었다. ‘인도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을까?’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나뿐이고 인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편하게 잘 살고 있었다. 진짜 잘 사는 사람은 모든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줄여가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해서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들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과하게 소비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가볍게,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법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날 보았던 최고의 조명 쇼를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친해진 인도 친구의 마지막 선물로 한밤중에 갠지스강 가운데서 가트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캄캄한 밤 보트를 타고 강가로 향했다. 그렇게 몇몇 친구들과 보트에 앉아 가트를 바라보는데 깜짝 놀랐다. 갑자기 길게 늘어선 가트의 한 부분이 확! 검게 변하는 것이었다. 전기가 나간 것이었다. 주변 불빛도 그다지 밝지 않아서 몇 대의 건물이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바라보는 나도 깜짝 놀랐는데 그 건물 안에서 밥을 먹거나, 책을 보고 있었을 누군가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잠시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인도인 내 친구는 “노 프라블럼”이라며 잠시 전기가 나간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조금 기다리니 다시 불빛이 돌아오고, 또 다른 부분이 새카맣게 사라진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정전과도 어우러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에서 귀국하는 여정에 하루를 홍콩에서 경유했다. 잠시나마 홍콩의 명물이라는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페리를 타고 스타의 거리로 향했다. 겨우 자리를 잡아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시시할 수가 없었다. 공중을 향해 쏘아대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높다란 건물을 뒤덮은 세계적 기업의 간판들이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홍콩의 스카이라인에 갠지스 강의 잔잔한 어둠이 겹쳐졌다. 수 억 원의 돈을 쏟아부어 공중에 퍼지고 있는 불빛을 좋다고 바라보는 우리들과 한 건물이 통째로 사라진 듯 정전되어버린 건물에서도 “노 프라블럼”을 외치고 있을 인도 사람들을 생각했다. 진짜 가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젠가 갠지스 강에도 패키지 관광객을 태운 거대한 유람선과 밤인지 낮인지 구별할 수 없는 환한 조명이 침투하게 될까? 그것이야말로 발전이 아니라 철학이 부재한 진짜 가난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만난 갠지스 강에는 돈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논하는 철학이 흐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갠지스 강은 그 모습 그대로이길 마음속으로 소망해본다. 한밤 중 갠지스강의 정전이 내게는 홍콩 야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조명 쇼로 기억될 것이다.  

갠지스 강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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