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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May 25. 2017

가우디의 도시

 축구, 해변, 그리고 가우디. 가우디의 도시라고도 불릴 만큼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그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다. 바르셀로나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지만 단연 가우디만큼 마음을 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오기 전까지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본 그의 작품들은 물론 독특하긴 했지만 마음을 사로잡진 않았다. 그저 동화책에 나오는 집이 현실화된 것 같은 아기자기함이 인상 깊은 정도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의 작품이 달리 보이고 그 아름다움이 와 닿게 된 것은 비로소 바르셀로나에 와서 그의 삶과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놀란 것은 가우디의 건물이 너무 시내 한복판에 다른 일반적인 건물들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까사밀라와 까사 바뜨요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두 건물은 모두 1900년대 초반 각각 바트요와 밀라라는 사람의 의뢰로 지어진 개인 주택이었다. 비슷한 연대에 지어졌지만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까사바트요가 꼭 인어공주가 살고 있을 것 같은 동화 속 집에 가깝다면, 까사밀라는 모노톤의 현대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둘 다 바르셀로나 가장 번화가에 떡하니 우뚝 서 미친 존재감을 발휘한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곡선이 네모진 건물만 보아왔던 우리를 꼭 놀리는 것 같다. 오히려 왕궁이나 유적지가 아니라 시내에 지어진 일반 건축물이라는 것이 나는 더 좋았다. 항상 똑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반기를 들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일까? 그라시아 지구에 있는 숙소에서 람블라스 거리로 향할 때면 이 두 건물을 매일같이 지나치게 된다. 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과 여행자들로 붐빈다.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때도 이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볼 수 있어서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두 건물 사이에 쌩뚱맞게 위치한 까사바뜨요

  가우디가 이 도시에 남긴 것은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도 구엘 공원은 그가 바르셀로나 시민뿐 아니라 이곳을 찾는 모두를 위해 남긴 선물 같은 곳이다. 물론 처음엔 중산층을 위하 사유 주택단지로 조성된 것이긴 해도 말이다. 예상외로 인기가 없었던 이 단지는 그 덕분에 시민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바르셀로나의 상징적인 공원이 되었다. 관리인의 집과 관리사무소는 딱딱한 업무가 이루어지는 장소라고는 믿을 수 없게 동화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의 아이디어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공원 곳곳에 보인다. 비가 내리면 그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원기둥을 타고 내려와 도마뱀의 입으로 나오게 만든 분수, 파도가 치는 모습을 그대로 굳혀버린 것 같은 터널이 그렇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 가족 성당은 가우디 건축물 관람의 대미를 장식할 끝판왕이다. 말년에 그가 모든 일을 포기한 채 매달렸던 작업이기도 하고 여전히 건축 중이라 현재 진행형인 건물이기도 하다. 성당의 외관과 내부, 규모 모두가 엄청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 성당이 감동적인 것은 가우디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가이기 이전에 신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섬기는 신자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는 자신의 위대함을 뽐내려는 오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존경이 느껴진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지겹도록 많은 성당을 보게 된다. 높이 솟은 첨탑과 엄숙한 내부는 신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낸다. 하지만 때로는 웅장한 성당에서 신보다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들에게 신은 무엇이었을까? 인간 자신의 지위와 재력을 지키기 위해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한 것은 아닐까? 중세 유럽에는 그토록 위엄 있는 성당을 만들기 위해 종교라는 이름 아래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을 착취하고 수탈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유명하다는 성당에 들를 때마다 성스러움 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이기까지 한 인간의 일면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가우디의 성당은 달랐다. 그는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신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했던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재물과 희생을 요구하는 엄격한 재단의 모습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을 내려주는 자연 그 자체였다. 더위를 식혀주는 커다란 나무들과 그 사이로 비치는 아름다운 햇빛, 푸른 하늘과 주변을 감싸는 공기. 그 자연을 주신 것이 신이고 그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신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 성당에는 그의 이러한 고민과 신념을 아낌없이 표현되어 있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밝고 따뜻한 빛이 비친다. 마치 나를 보호해주는 듯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특정한 종교가 없다. 그럼에도 진정 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신의 사랑 속에서 기도하고 행복하길 바랐던 가우디의 진심에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이었다.

가우디 최고의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자연을 관찰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에게 있어 신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작품에는 파도, 하늘, 태양, 꽃과 나무와 같은 자연의 모티프가 살아있고, 재료 역시 재활용품을 사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가우디는 이 성당을 짓다가 불의의 사고로 숨을 거두게 된다. 매일 온종일을 성당 건축에만 몰두했던 가우디는 허름한 옷차림 탓에 사고를 당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신의 성전을 짓는 일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우디가 만든 창으로 내리쬐는 햇살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따스함을 느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가우디의 작품은 카사비센스이다. 위에 언급한 대표적인 건물들과 달리 이 건축물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도 아니다. 1878년에 지어진 것으로 가우디의 완전 초기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눈에 익은 가우디의 특징들이 보이기보다는 일반 건물에 더 가깝다. 건물의 외변에 쓰인 선은 모두 직선이며 네모진 형태를 띠고 있다. 위치도 찾아오기 애매한 데다 가우디 특유의 개성도 찾아보기 힘드니 이곳이 홀대받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가우디의 초기작 까사비센스-아직까지는 일반 건물과 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곳 까사비센스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바로 이 건물이 일반적인 건물의 형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흔히들 가우디 같이 개성 넘치는 천재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처럼 생각한다. 날 때부터 유별났고, 영감과 재능을 타고났다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 카사비센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가우디 역시 건축학교에서 일반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초기에는 일반적인 건축의 관행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후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향한 끝없는 고민과 새로운 시도들이 지금 사랑받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교육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 영향을 받으며 살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도 자신만의 고민과 철학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계속된다. 그것을 억압하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한 사람의 우주와 세계는 피어나고 빛을 발하게 된다.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는 가우디에게 그런 곳이었고, 그래서 그 역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이 도시에 펼쳐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우디가 요즘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스페인에는 유달리 가우디처럼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이 많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피카소나 달리도 모두 스페인 출신이다. 이들은 단지 뛰어난 기량 때문이 아니라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한 이들이다. 남들과 다르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불편해하고, 그래서 남들과 다르고, 튄다는 것은 쉽게 억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른 것들이 보여주는 다양함 때문이다. 만약 세상이 모두 단일한 생각을 가진 똑같은 사람들뿐이라면 통치나 지배에는 수월할지 몰라도 분명 재미도 없고, 변화도, 발전도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사람들 역시 다수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었던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성을 강요하면서도 똑같은 것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얼마나 모순적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이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라면 좋겠다. 지금까지 없었던 어떤 새로운 시도와 도전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좋겠다. 그것이 조금 불편하고 이상할지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그 시도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받는 그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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