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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May 28. 2017

평화가 머무는 곳, 나긴다르의 집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말 주변에는 적막한 정적과 안개, 산밖에 없는 곳이었다. 전형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도라기보다는 강원도 산골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공기는 정말 맑았다. 너무 평온하고 순수한 곳이라 앞으로 여행할 인도에 실망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인도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워크캠프를 신청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2주 동안 삼시 세 끼를 카레(카레밥, 카레 야채, 카레 누들)로 채식을 하고, 뜨거운 물이 안 나와 씻기도 어려웠지만 어떤 여행지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여기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배웠다.

  주변은 온통 산과 나무뿐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농사를 짓고 멍 때리며 보냈다. 시간이 나면 빨래도 하고, 산책도 하고, 아이들과 뛰어놀다 보면 하루가 갔다. 아마 내 인생에서 세끼를 모두 카레만 먹으며 채식을 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밥도 전기도 없이 촛불을 켜놓고 차가운 흙바닥에 다 같이 둘러앉아 먹었다. 아궁이에 나무땔감으로 불을 붙여서 솥으로 음식을 데웠다. 민속촌에서 사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그들이 사는 모습대로 함께 살며 나다르 가족들과 서로에 대해, 인도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웃고, 울던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나긴다르 아저씨의 가족들은 정말 따뜻하고 친 가족처럼 우리를 대해주었다. 나긴다르 아저씨는 말수도 적고 늘 수줍어하시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은근히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마음 따뜻한 분이셨다. 아저씨와는 달리 과거 과학 선생님이셨다는 아내 분은 항상 웃는 모습으로 먼저 다가와 말씀을 건네주시는 분이었다. 우리 모두 엄마라고 불렀는데, 정말 친엄마 같은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주변에 가득했다. 너무 엄마 같아서 우리 모두 엄마(마마)라고 부른 탓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성함을 끝까지 몰랐다는 것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나긴다르의 집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세 자매가 있었다. 큰딸 네하와 둘째 까리마, 셋째 찌꾸다. 세 자매는 모두 수줍음이 많았지만 항상 우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언제든 발 벗고 도와주는 착한 소녀들이었다. 첫째 네하는 유난히 말수가 없는 전형적인 큰 딸이라면, 둘째 까리마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하는 활발한 아이였고, 아직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찌꾸는 한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는 개구쟁이였다.    

  워크캠프 일정이라는 것은 알고 보니 대단한 것이 없었다. 그냥 이 가족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지내면서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에는 다 같이 모여 앉아 인도어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다.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 먹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가끔 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이웃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어떨 때는 시간이 남아 한참을 멍 때리고 있거나 계속 산책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시한 프로그램이었을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집 앞에 펼쳐지는 풍경 -매일매일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

  이곳에서의 생활은 불편했다. 밤에는 너무 추워서 몇 일째 씻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옷, 양말도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은 보일러를 때어서 한정된 시간 동안 소량으로 받아서 찬물과 섞어서 사용할 수 있다. 밥도 찬 흙바닥에 앉아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전구 하나에 의지해서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델리 같은 대도시보다 훨씬 외지고 가난한 곳이지만 어떤 아이도 구걸하지 않는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땅과 동물들을 돌보고 돌아와 작은 마당에서 뛰놀며 하루 종일 웃음을 잃지 않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 편리하다고 하는 도시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마당에서 빨래 중인 나긴다르 가족들

  집 밖으로 걸어 나오면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보인다. 빌딩이나 화려한 조명,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 산과 계곡, 하늘을 보며 한참을 걷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점심을 먹고 따뜻한 햇살이 비출 때, 태양이 지는 오후에 그냥 정처 없이 집 근처로 난 산길을 따라 걸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런 시간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되짚어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차례차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쉴 새 없이 달려온 지난날. 내가 언제 행복한지, 원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동안 날 힘들게 하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짬이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연을 바라보며 몇 발자국 내딛는 것만이 없는 이곳에 와서야 그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불필요한 것들에 둘러싸여 진짜 필요한 것들을 잃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물론 당장 내가 살아온 모든 습관과 익숙함을 버리고 나긴다르의 식구들처럼 살라고 한다면 선뜻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런 삶이 있음을 알았고, 이런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마 내가 이날 만났던 이들의 삶과 일상은 나에게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등바등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전부는 아니라고, 언제든 원한다면 또 다른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용기와 가능성을 만난 시간이었다.

나긴다르 집 앞마당에서 함께 비누방울을 날리며 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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