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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아라 Aug 26. 2022

8월 5일

모른다

부모님과 함께 산 어린 시절, 뽀삐, 예삐, 다롱이, 달우 등 집을 거쳐간 많은 개 그리고 땅콩이라는 고양이가 기억에 있다. 새도 물고기도 엄마의 반려식물도 있는 반려하는 게 많은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사람 아닌 반려 생명체가 집에 있어야 집 같은 성인으로 자랐다. 그렇지만, 내 손으로 기르고 돌 본 생명체만이 내게 책임감과 생과 사에 관한 어떠한 바를 자명히 가르쳐준 것 같다. 고양이 2마리를 온전히 책임져 기르고 보낸 지난 16년 동안 “사회성”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고양이라는 독특한 성격의 생명체를 기르는 사람끼리의 “연대감”이 있었을 뿐이었다. 둘을 모두 여의고 스스로 보호소에서 개를 데려와 기르게 된 후로 접한 이 “사회성”이라는 항목은 마치 사람 아이를 기르는 여러 가지 양육조건,  필수 교육 덕목과 아주 유사하게 설정돼 반려산업에서 많은 반려인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점이 몹시 흥미로웠다. 


도시의 개들은 바깥 활동을 제한적으로 하고, 마주하는 상대 개와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조용히” “평화롭게” 잘 대면해야 한다는 사회성 덕목 때문에 견주도 개도 신경을 많이 쓴다. 운이 좋게도 차분한 베라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아주 잘하고 있지만, 이 항목을 두고 일어나는 혐오와 배척, 윤리성을 둔 시시비비의 분쟁 상황들은 참 어느 결에서는 사람 아이의 양육과 비교될만한 부분이 많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정도다. 


깊은 이야기를 하자면 일기가 길어지니, 이쯤에서 하고 오늘은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며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내 친구들과 오전에 만나 숲에서 휴가를 즐겼다. 일하는 날, 늘 기다리는 베라가 휴가에 여한 없이 산책을 하고, 나는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지루함을 즐기는 것이 이번 휴가의 목표이다. ☺️ 


개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게끔 하는 건 너무 큰 꿈일까. 개 교육 방식에 있어서도 능동적 수동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는데, 다른 생명체 간의 소통이라 더 관찰적이고 세심하게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 살면서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반응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것이 인간과 비인간에게만 해당할까. 이들과 살며 부모의, 타인의 감정을 유추해보기도, 친구들의, 가족의 양육을 보며 어린 나의 부모를 이해해보기도 내 개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생명체 와든 1:1의 관계로 함께 사는 것은 그 이상의 세계를 배워가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 가장 주저할 뿐이다. � 


모른다는 설정을 할 수 있어서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것. 적어도 개나 고양이나 반려 동식물과 살면서 무한히 얻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희생”이란 단어는 적어도 이 양육에 있어서만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내 배를 앓거나 남의 배를 앓아서든 얻는 핏덩이(혈육)를 눈앞에 두고 얻는 감정과 경험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고 어쩌면 바라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그 무게감에 짐짓 멀리 떨어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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