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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 Aug 13. 2024

수영 후 먹는 라면이 생각나는 날

여러분도 추억의 맛이 있나요?


오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라면이 생각났다. 그것도 그냥 라면이 아닌, 수영 후 먹는 라면이. 


10살, 어릴 적 나는 수영장을 좋아했다. 개수영도 못하는 맥주병이지만 그래도 수영장 가는 게 가장 좋았다. 일주일에 3번 이상 친구들과 함께 자유수영을 갔고, 혼자 수영 연습도 열심히 했다. 연습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지만, 여전히 수영은 못한다. 


수영장에서 한 시간가량 놀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이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배꼽시계다.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고, 2층 볼링장으로 내려간다. 수영 후에 웬 볼링? 볼링도 칠 줄 모른다. 볼링장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에 라면이 있기 때문. 


2층 볼링장 한 구석에는 매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끓여주는 라면을 판매했다. (라면 끓여주는 기계가 지금처럼 상용화되기 전이다) 볼링장에 있는 매점이지만, 그곳 손님들은 대부분 머리가 젖어있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면치기 실력을 뽐내며 라면을 후루룩 넘기고 있었다. 


수영 후 먹는 라면의 맛. 나의 하찮은 글 실력으로는 감히 그 맛을 표현할 수 없다. 수영장 소독 냄새로 마비된 내 코와 입맛을 단번에 자극하는 MSG의 향과 맛. 그리고 내 위장에서 펼쳐지는 매콤 국물에 절여진 면들의 향연. 어쩌면 나는 수영이 좋아 수영장에 간 게 아니라, 수영 후 먹는 라면이 좋아서 수영장에 간 걸지도 모른다.


일어나자마자 그때의 라면이 생각난 오늘. 당장 수영장에 갈 수는 없어서 러닝화를 챙겨 신고 아침 조깅을 나갔다. 30분 정도 뛰고 나면 수영한 것처럼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 열심히 뛰었고, 헥헥 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시릴 정도로 찬 물에 샤워를 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쐐며 라면을 한 봉지 끓였다. 계란도 하나 탁 깨트려 넣었다. 면이 꼬들꼬들 딱 먹기 좋아질 때쯤, 불을 끄고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20년 전, 수영 후 먹었던 라면의 맛을 회상하며 한입. 운동 후 그때와 똑같이 지친 몸이었지만, 라면의 맛은 똑같지 않았다. 그래, 추억의 맛은 이런 거구나. 그때의 라면은 20년 동안 내 추억이라는 조미료와 함께 더 맛있게, 맛있게 조리되고 있었다. 지금 그 수영장을 찾아가 수영 후 라면을 먹더라도 맛은 다르겠지.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때의 라면 역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다. 


그래도 나에겐 오늘의 라면이 눈앞에 있으니, 맛있게 먹으면 된다. 20년 뒤, 50살이 된 나도 오늘을 기억하며 라면을 또 후루룩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러닝 후 한껏 지친 오늘의 라면에 세월의 씁쓸함을 한 스푼 넣어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정신없이 먹느라 사진 찍는 걸 깜빡했다. 애정하는 삼겹살집 특제 라면 비주얼로 대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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