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 삼존불은 대학생 때 답사로 첫 만남을 갖은 이후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탁본을 위해 보원사지를 올 때 빼놓지 않았고, 결혼 후 용현자연휴양림과 캠핑장을 방문할 때도 또 올랐다.
천년하고도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애 삼존불은 20년 동안 변한 것이 있다. 작게는 마애 삼존불로 오르는 길이 몇 차례의 공사로 조금씩 바뀌었다. 크게는 첫 만남 때에는 마애불을 보호하는(?) 전각 안에 수줍은 인사를 나누었지만 몇 해 전부터는 전각을 벗어던지고 더욱 환한 모습으로 늘어난 우리 식구를 맞이해 준다.
전각에서 벗어난 마애 삼존불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에 여러 번 찾아도 그 맛이 새롭다.
시골 촌놈으로 비린 맛을 모르고 자란 덕에 새로운 음식에 낯을 가린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정신이 강하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도전에 성공했다. 맛있다.
방문객이 많은 날에는 차량 이동으로 인한 먼지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야외에 마련된 식탁에서 계곡을 바라보고 먹는 맛이 그만이다. 차량 운전에서 자유롭다면 막걸리를 곁드리면 더 좋다. ㅋㅋㅋ 맥주를 좋아하는 아내도 이 집에 오면 막걸리를 즐긴다. 어죽에는 막걸리란다. 운전하는 나는 눈으로 즐긴다.
물이 많고 적고 간에 항상 물이 맑다. 물이 맑으면 고기만 찾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찾는다. 4대강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참는다......
중2, 초6 딸과 아들도 자신의 나이 만큼은 이곳에 왔을 것 같다. 짧은 거리지만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둘이 올라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는지. 궁금해!
최근에는 용현자연휴양림 캠핑장을 이용하면서 마애 삼존불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캠핑 일정에 따라 아침에 오르기도 하고 저녁에 오르기도 한다. 어느 시간 때이건 괜찮다. 땀 흘려 오른 만큼의 감동을 꼭 준다.
뒷모습이 다정해 보인다. 무슨 얘기를 할까? 남매지만 성향이 다르다. 딸은 문과적인 성향을 아들은 이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국어와 수학을 잘하고 못하는 기준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누나를 따라 유치원 다니던 아들이 조금 컸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심각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의 중재로 해결은 된다.
길잡이 딸과 아들
우리집 실세 등장
역사쟁이 아빠, 엄마의 영향으로(?) 동기들 보다 역사적 지식이 풍부한 편이다. 부모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자기 수준에 맞는 역사책을 즐겨 보기도 한다.
답사와 캠핑이 아니더라도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즐겼다. 딸이 돌이 되기 전에 시작한 것이니 15년이 넘었다.
혼자서 시작한 답사가 둘이 되고 이제는 넷이 되었다. 같은 유적지를 여러번 방문해도 아이들까지 자기 생각과 주장을 펴다 보니 답사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엄마의 중재가 있는 것을 보니 다정한 대화는 아니었나 보다.
관리사무소 마루 한편에 마애 삼존불 안내장이 놓여 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읽어보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화장실은 깨끗하다. 불이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가면 마애 삼존불을 올려 볼 수 있다.
마애 삼존불이 발견된 초기의 사진을 보면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 앞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 듯 보인다. 앞 쪽이 깊이 파인 계곡이었던 것 같다. 관람객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축대를 쌓았다.
인증샷
인증샷
아래쪽 계곡은 피서객으로 넘쳐났지만 우리 가족이 오르는 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편안하게 인증샷도 찍고 요리조리 마애불을 찍었다.
자연광을 받고 수줍은 듯 온화하게 웃고 있다.
바위 전체가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위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돌이 처마 역할을 한다. 천수백 년을 버티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서산 마애 삼존불은 당시의 미적인 우수성 뿐만 아니라 과학 수준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햇볕에 따라 웃는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존불이 동동남 30도로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햇볕을 가장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라고 한다. 경주 석불사 석굴암 본존불도 같은 방향이라고 하니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마애 삼존불은 자연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앞쪽으로 80도 정도 기울어진 천연 암벽 위에 새겨 놓아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측면에서 보면 불상을 새기는데 들어간 공력을 확인할 수 있다. 살짝 금긋듯이 새긴 것이 아니라 상당한 높이로 조성되어 있다.
서산 마애 삼존불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바위에 세분의 불상을 새겨 놓았다. 중앙이 석가여래 입상,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이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안내글에 소개되고 있다. 왼쪽의 제화갈라보살 입상에 대해서 관음보살 또는 제화갈라보살이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제화갈라보살로 정리된 것 같다.
마애불을 조성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라고 한다. 특히 코와 눈을 새겨 넣기가 어렵다고 한다. 코는 마애불 중에 가장 높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번 낮아지면 전체 불상이 그만큼 낮아져야 하고 뚝 튀어나온 부분이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어서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눈의 경우에는 한 번 커진 눈을 작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작게 시작해서 점점 더 크기를 늘려야 한다.
망치와 정을 가지고 이루어진 작업이었을 것이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불심이 합쳐졌을 때 가능했을 것이다.
서산 마애 삼존불을 대표하는 표현은 당연 '백제의 미소' 이다. 온화, 평화 등의 다양한 미소를 짓는 부처는 무엇을 위해 암벽에 서 있었을까?
근엄한 불상의 모습에 미소가 나타나는 시기가 6~7세기 경이라고 한다. 이때의 백제는 한강을 두고 경쟁하던 고구려에 밀려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천도를 했다.
중국과의 교역은 국운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강을 빼앗긴 백제가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게 된다.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만든 교역의 중심지가 당진과 태안이었고, 교역항을 떠나 수도에 이르는 길 또한 개척된다. 이 교역로가 당진`태안을 시작으로 서산과 예산을 거치고 수도인 공주와 부여로 연결된 것이다.
이 거점이 되는 곳마다 불상을 모셨다. 태안의 마애 삼존불, 서산의 마애 삼존불,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등이 조성되었다. 교역의 길목에 불상을 조성해 교역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고,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 역할을 아직까지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서산 마애 삼존불은 보원사지 발굴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발굴팀은 조사를 나올 때마다 주민들과 나무꾼에게 산에서 석탑이나 부처의 흔적에 대해 묻곤 했다고 한다.
(물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원사 일대에 99개의 절집이 있었는데 어느 스님이 100을 채우겠다고 백암사를 짓자, 백암사만 남고 나머지 절집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이 아닐지라도 절집이 많았다는 것을 근거로 사용될만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만난 나무꾼이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짱돌을 쥐고 집어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나의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삼애 삼존불을 보게되면 웃음이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