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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Feb 24. 2017

윤봉길 기념관에 가다.

예산, 윤봉길 기념관에 가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윤봉길이 만주로 떠나며 남긴 글이다. 죽을 각오로 뜻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고, 끝내 자신이 남긴 글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1920년대 말 30년대 초는 독립운동과 임시정부가 큰 위기를 맞는 시기였다. 1925년 국내에서 치안유지법을 실시하고 만주지역에서는 미스야 협정을 체결한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숨통을 틀어쥐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세워질 당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주안점 두었다. 하지만 외교적인 성과가 크지 않았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큰 성과 없이 끝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존폐 위기에 놓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은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한인애국단이 탄생하였다. 
  한인애국단이 세간에 주목을 받은 것은 이봉창의 일왕에 대한 폭탄 투하 사건이었다.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언론은 "아쉽다"는 조의 기사를 실었고,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제국주의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게 된다.
  일본제국주의는 상하이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승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하이 사변 승전 축하와 일왕 생일 축하 행사(천장절)를 홍커우 공원에서 열게 된다. 
  이때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게 된다. 이것이 홍커우 공원 의거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중국군 백만 대군이 못 하는 일을 해냈다." 며 윤봉길을 칭송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 중국 내에서 임시정부가 활동하는 것을 인정해주었고, 훗날 임시정부의 군대 창설을 돕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윤봉길의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부분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었다. 
  




윤봉길 기념관 주차장
충의사 입구
윤봉길 기념관 입구
윤봉길 사적비
윤봉길 기념관 입구

                                                  윤봉길 기념관 입구의 무궁화와 태극기

  개인적인 것이지만 꽃으로써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윤봉길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윤봉길 기념관

                                                                           윤봉길 사진

  잘 알려진 사진이다. 홍커우 공원 의거 전에 촬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윤봉길 행적과 관련된 영상 관람

  윤봉길은 중국 망명이전 농민운동에 힘썼다. 공동묘지 묘표 사건은 윤봉길이 문맹퇴치를 위해 농민운동에 힘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친필

                                                           윤봉길과 김구의 만남에 대한 글

                                                                     홍커우 의거 재현

                                                                     아들이 만든 기념 모형

                                                                            도시락 물통 폭탄

  윤봉길의 의거 당시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현장에서 사용한 것은 물통 폭탄이었고, 도시락 폭탄은 자결할 때 사용할 목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장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1932년 12월 총살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25세였다. 순국하기 전에 남긴 유언장이다. 
  순국 후 시신은 주변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1946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기념 촬영

                                                                         윤봉길 어록탑

윤봉길 의사  흉상

  얼마 전 살아있는 한 노쇠한 정치인의 동상을 모교에 세운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고, 최근에는 철원지역에 공사비 60억을 들여 박정희 전역공원을 조성해 논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친일파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아담하게 지어진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을 보며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 의사의 후손들이 남의 집 곁방살이를 했다는 얘기를 대학 다닐 적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언  -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대를 이어 조국을 위해 몸 바치기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러한 윤봉길 의사의 마음처럼 전개되지 않았다. 관동군 출신 장교가 대통령이 되고, 그 자녀가 또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이 상황을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광복절' '건국절' 논란에 대해

  오늘날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막 가고 있다. 71주년 광복절 행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건국 68주년' 을 언급해 논란이 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현행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고 나와 있다.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건국 68주년 발언은 헌법에 위배되는 발언인 것이다.
  '광복절' 이 아닌 '건국절' 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친일에 대한 부정이다." 일제 강점기 36년간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들의 행위는 반 국가 행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현직 대통령과 일부 사회적 기득권 세력을 중심으로 '건국절' 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게 생각할 것 없다. 그들 조상의 친일 행위를 감추기 위함이다. 
  당신네들 조상의 친일 행위가 그렇게 해서 감춰질게 아니라고요!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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