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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잠

살구인지 아닌지, 시비는 가리지 못하고 110715

by 로댄힐

세 그루의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늘 흔들린다. 그중 한 그루는 명확하다. 국제원예종묘에서 주문해 심은 살구나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살구를 달았다. 이듬해에 옮겨 심는 바람에 열매 수가 적긴 했지만, 내년이면 풍성하게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제법 단단하다. 이 나무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확실한 살구다.


문제는 나머지 두 그루다. 자두나무라고 해서 받아 심었지만 다섯 해가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않다가, 지난해에야 겨우 한 그루에서 노랗게 익은 몇 알이 달렸다. 그 몇 알을 두고 편과 나는 꽤 오래 실랑이를 벌였다.


“자두네.”

“아니다, 모양이 자두가 아니다.”


나는 자두나무라고 믿고 싶었고, 편은 아무리 봐도 자두가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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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두 나무는 몇 알씩 열매를 달았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모습이 자두의 주황빛과는 거리가 멀었고, 크기 또한 살구보단 컸다. 살구 같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더욱이 두 나무의 열매는 서로 모양이 달라 한쪽은 매끈하고 조금 작았고, 다른 한쪽은 또 다른 형태였다. 결국 우리는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자료를 찾아보다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자두는 기후와 지리 조건에 따라 착과가 잘 되지 않는다. 열매가 드문 이 두 나무가 자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개량종 자두 중에는 노랗게 익는 것이 있다는 점. 그렇다면 우리가 헷갈렸던 그 열매들은 어쩌면 자두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한해만 더 기다려 보자.”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야 비로소 이 열매의 정체를 알 수 있겠지. 열매를 거의 맺지 않는 나무를 계속 둘지, 다른 결정을 내릴지도 그때 판단할 일이다.


칠월, 땀의 계절이다. 장마철인데도 땀은 끝없이 흘러내렸다. 밭일하는 동안 쏟아낸 땀은 강물만큼이었다. 이보다 더 뜨거울 칠월 하순과 팔월은 또 얼마나 더 많은 땀을 요구할까.


젖은 옷을 갈아입고 씻어낸 뒤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일체형 야외용 탁자의 의자에 앉지 않고 탁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탁자 위에 있던 시빗거리 열매들은 바구니에 담아 다른 곳으로 치웠다. 바람은 시원했고, 악양 들판은 한눈에 들어왔다. 탁자 위에 올라앉았다는 작은 무례함이 오히려 등골을 간질이는 시원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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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도 될까?”


처음엔 주저했지만 결국 몸을 눕혔다. 놀랍게도 탁자는 침대처럼 시원했다. 천장이 가까워 더울 줄 알았는데 아래위로 통풍이 잘 되는 자리였다.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오고, 잠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잠들기 직전 바라본 악양 들판은 평소와는 또 다른 세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잠은 마치 황제가 여름 한낮에 누리는 짧은 눕힐 자리 같았다. 땀을 씻고 난 뒤의 탁자는 잠시나마 나를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백일몽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깊은 낮잠이었다.

눈을 뜨고 다시 살구들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매들이었지만, 더 이상 조급하지 않았다. 내년이면 그 모습이 분명해질 것이다. 정답은 시간을 통해 스스로 드러나겠지. 이 여름의 열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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