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다 되어가시는 우리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매일 나에게 평일엔 하루 1번(저녁 7시 30분경), 주말엔 하루 2번(낮/저녁) 전화를 거신다.
사실 평일에 퇴근하고 와서 핸드폰은 쳐다보기도 싫을 때나, 사무실 사람들과 저녁을 같이 먹을 때나, 남자를 만나고 있다거나 할 때 등등, 할아버지 전화를 받는 데에 적합한 상황이 아닌 경우가 꽤 많다. 하지만 성격이 여간 급하신게 아니고 온갖 걱정을 사서 하시는 타입인지라 말만 한 손녀딸이 그 초저녁에 끝끝내 전화를 안 받으면 어디 납치라도 되었나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해 배배 꼬이신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궁금하니깐 어차피 전화를 또 건다.) 정말 못 받는 경우가 아니면 받는다.
이러다 보니 나랑 조금만 같이 알고 지내다 보면 직장 상사, 친구들, 남자 친구 할 것 없이 막강한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어느 정도 되고 나면 갑자기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의문의 전화 통화를 하면 '-'?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에게 옆에 있는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할아버지야. 할아버지가 맨날 전화를 한대. 그치 신기하지?"라며 대신 해명을 해주는 지경에 이른다.
오죽하면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는 "할자친구"라는 별명이 생겼다....
사실 통화로 별로 하는 얘기는 없다.
저녁은? 먹었어요.
피곤하냐? 네...(빨리 끊기 위해 최대한 피곤한 목소리)
그렇게 피곤하냐? 아니 뭐...
그럼 때려쳐~낄낄. 쩝 아니에요 갠차나요..
그래 쉬어라! 네 안녕히 계세요.
정도로 끝나는 게 대부분.
주변에선 할아버지랑 어떻게 맨날 통화를 해? 난 거의 연락도 1년에 몇 번 안 하는데.라고 신기해하기 일쑤다. 나도 살짝 민망한 자리에서라면 "안 받으면 계속해서 어차피 받아야 돼요 스토커예요 거의!"라고 머쓱하게 해명하면서 전화를 받지만, 마음 속에선 은근히 뿌듯함도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건 비밀.
그런 상황이 아니어도, 매번 밥먹을 때나 좀 쉬려고 할때 어김없이 오는 전화가 귀찮을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짧은 대화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만날 친구도 없이(실제로 친구라도 만나시라고 했다가 누구는 언제 죽었고 누구는 언제 죽었고.. 끝없이 읊는 부고를 들어야 했음) 하루 종일 무료한 할아버지의 하루에서 누군가 대화할 기회이자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이고, 전화하려고 내가 퇴근하는 시간만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차마 안 받고 넘길 수가 없다.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나의 일상 중에도 한 부분이 된 이 짧은 대화가, 그런 날이 영원히 안 오길 바라지만, 언젠가 하고 싶어도 못 해서 사무치게 그리워질 날이 올 거란 걸 알기에.
연애를 하다 보면, 특히 남자 친구와 싸우거나 했을 때 애타게 전화를 기다리다가 막상 벨이 울려 기대에 부풀어 폰을 들면 '할아버지'라고 뜬 걸 보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날 울리고, 실망시키고 떠나갔지만 할아버지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나의 유일한 팬이다.ㅎㅎ 내가 그들의 전화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때 날 먼저 찾는 사람은 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할아버지의 존재란, 내가 뭘 해도 날 사랑해주고 내편을 들어줄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이제는 할아버지에게서 이틀째 전화가 안 오면 혹시 어디 아프신건지 걱정되어 내가 먼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렇게 쓰다보니 깨달았는데,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었구나 싶어서 조금 뜨끔해졌다. 오늘은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