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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faitement imparfaite Aug 13. 2020

누가 무엇을 아는지를 아는 것의 문제

The Great Game

과년한 딸래미들이 셋이나 있다 보니 우리 4 모녀간엔 비밀도 많고 가십도 많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영원한 비밀도 없다.


우리 세 자매간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데, 서로의 남자 친구 일에 관해 엄마에게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던지, 엄마에겐 친구 집에서 잔다해놓고 외박을 한다던지, 친구와 간다던 여행을 남친과 간다던지 하는 경우에 엄마는 나머지 두 명에게 혹시 쟤 남자친구 있는 것 아니냐고 캐보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우린 세상 무심한 표정으로 "몰라. 남친 없을걸?" 하며 서로를 커버해주고 지켜준다.


서로가 서로의 어두운 비밀과 조잡한 거짓말을 엄마에게 불기 시작하는 순간, 대폭로 배틀이 이어질 것이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이 룰은 여태껏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본인이 사서 들키지 않는 이상은. 마치 모든 국가가 핵보유국이 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론과 비슷하다.


내 첫째 동생에겐 동훈이(가명)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대학교 때부터 몇 년씩이나 엄마에게 안 들키고 연애를 해왔다. 엄마는 동훈이가 동생과 절친한 남사친인줄로만 알고 지내왔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아무튼 엄마가 어느 날 다급히 전화를 해왔다. 이미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다.


"얘, 내가 니 동생 책상이 너무 돼지우리 같은 거야! 그래서 정리하다가 웬 두꺼운 노트가 있길래 봤는데 어머 이게 뭔지  알아? 동훈이가 얘 생일이라고 지금까지 몇년 동안 놀러간 사진같은거 붙여놓고 그 밑에 편지 써놓고 그런거야!!어머 너무 웃겨!!!어줄게 들어봐??


201×.×.××. 누구야 우리가 한강에 소풍갔던 날이야~우리가 앞으로도 이렇게 오래오래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201×.×.××. 네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 항상 고맙고 미안해~~랑해♡


ㅋㅋㅋㅋㅋㅋㅋㅋ어머 얘네 왜이러니 ㅋㅋㅋㅋ


2019.×....아니, 이건 뭐야 이건 펜션 사진같은데? 어머 얘네 둘이서 펜션도 갔나봐?? 이 미친×!!!!!!!!친거아냐!!!!!!!"


한없이 계속되는 동훈이의 달달하고 오그라드는 사랑 고백을 들으며 숨 넘어가게 깔깔거리며 비웃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일단 알았다고 끊었다. 엄만 자기가 러브장을 훔쳐본것은 비밀이라고 했다.


자 이제 팝콘을 튀길 시간. 동생한테 전화해야지!


나 : (짐짓 목소리를 깔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함) 야 엄마가 너 동훈이랑 사귀는 거 알고있는 거 알아?

동생 : 어 대충 예상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 근데 엄마가 니네 러브장 봤어 청소하다가ㅋ알아?그걸 왜 거기다 두냐 멍청아!

동생 : 아 뭐야 그걸 왜 읽어!!!

나 : 아무데나 흘린 니가 잘못이지. 엄마야 당연히 읽지!ㅋㅋ근데 엄마가 자기가 본 건 비밀로 해달래. 엄마한테 내가 말한거 아는척하지마

동생 : 알았어. 동훈이랑 사귀는건 계속 비밀로 하는걸로 해야겠어!


이젠 엄마에게 전화해야지.


나 : 내가 누구한테 동훈이 얘기했더니 엄마가 이미 알고있는 걸로 알고있던데?

엄마 : 그래? 이년이..가 걔네 그거 본건 얘기했어?

나 : 아니 얘기안했지!


자 정리해보면, 내 동생은 엄마가 동생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본인이 엄마가 러브장을 본 걸 안다는 걸 엄마가 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동생은 이 모든 걸 모르는 척 할 것이다.


엄마는 동생이 연애한다는 걸 본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동생이 알고 있다는 걸 알고있고, 러브장의 존재를 엄마가 알고 있다는 걸 동생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엄마 또한 이 모든 걸 모르는 척 할 것이다.


나는, 엄마가 동생이 연애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동생이 알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안다는 걸 알고있고, 엄마가 러브장을 본걸 동생이 알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알지 못한다는 걸 동생이 안다는 걸 알고있다. 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대략 이런 상황.

they don't know that we know they know we know!!!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이 게임판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자칫 실수하게 되고, 어느 한 명이 고발자로 몰려 이 섬세한 판이 깨지는 순간 파국을 면치 못할 수 있다.


동생의 연애는 한동안 모두가 알고있으면서도 엄만 동생이 연애하는 걸 알지 못하는 척, 동생은 엄마가 알고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척하며 비밀로 유지되었다. 동생이 남친이 늦은 입대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본 여행을 같이 가도 되는지 엄마에게 대놓고 물어봤다가 호적에서 파이고 싶으면 가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러나 내 동생은 결국 친구들과 함께 간다고 해놓고 남친을 슬쩍 끼워갔고, 난 그 사실을 알고있고 엄마는 모른다는 걸 알고있지만 역시 엄마에겐 아직 비밀로 해주고 있다. 자발적으로 들키기 전까지는! 하지만 걔의 허술한 거짓말 실력을 보아하면 어쩌면 이번에도 엄마도 대충 감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엄마가 안다는 걸 동생도 알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알고 있는걸 동생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아름다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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