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범선, 군용차량 그리고 열기구

by 윤슬작가

예전에 동네 2층에 〈펀펀블럭〉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레고를 좋아하는 둘째를 위해 한두 개 사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운 취미가 되었다. 작은 블록들이 거대한 차로, 우주선으로, 성으로 커져갈수록 금액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곳이 바로 〈펀펀블럭〉이었다. 일정 금액만 내면 원하는 레고를 마음껏 조립할 수 있는 공간. 마치 우리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 같았다.


유치원을 마치면 그곳으로 향했고, 주말이면 언제나 그곳이 목적지였다. 둘째는 놀라울 만큼 집중력이 있었다. 조그만 손으로 블록 하나하나를 맞추며 세상의 모든 디테일을 손끝으로 구현해내려는 듯했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진지하게 무언가를 조립하는 아이의 얼굴과, 완성된 작품을 나에게 자랑하던 해맑은 미소가 아직도 선명하다. 얼마 전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그 시절 사진을 다시 보는데, 첫째가 한마디 툭 던지던 말이 떠올랐다.


“너 엄마한테 잘해. 레고 하겠다고 얼마나 자주 갔는지 알아?

그거 다 돈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할 걸?”


그 말이 어찌나 우습던지, 한참을 웃었다. 그래도 그 시절이 참 고마웠다. 무엇보다 아이가 ‘사달라’며 떼쓰지 않았던 것, 커다란 조립품들을 집에 진열하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저 만드는 과정이 좋았던 아이, 완성보다 과정이 더 빛나던 시간이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세심했다. 다섯 살쯤 되었을 때였나, 공룡을 완성하겠다며 방에 들어가 두 시간 넘게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을 붙잡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디테일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날, 둘째가 누나와 함께 다이소에 갔다가 목재 범선 조립 키트를 사 온 것이다. 둘이서 조심스레 부품을 꺼내 맞추기 시작했는데, 옆에서 보던 남편과 나도 신기한 마음에 함께 앉았다. 작은 나무 조각들이 차례로 맞물리며 범선이 형태를 드러낼 때, 둘째의 눈빛은 어느새 초등학생 시절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잠깐 외출했다 돌아온 아들의 손에는 군용차량 조립 키트가 들려 있었다.

369피스, 예상 작업 시간 5시간.

아들은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이거 완성할래.”


그날, 거실은 작은 공방이 되었다. 둘째는 조립하고, 나는 설명서를 넘기고, 남편은 부품을 찾아 건넸다. 둘째 혼자 2시간을 진행했고, 호기심에 붙은 남편과 나, 이렇게 셋이 함께 꼬박 3시간을 매달렸다. 정말 둘째의 말대로 정확히 5시간이 걸렸다. 완성된 군용차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는 둘째의 표정은 작은 승리를 품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오래전 〈펀펀블럭〉에서 레고를 완성하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외출하고 돌아온 아들이 또 하나의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짜잔!”


이번엔 열기구 조립 키트였다. 해맑게 웃는 얼굴, 반짝이는 눈빛.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아니라, 공룡을 그리고, 블록을 쌓고, 세상의 모양을 배워가던 그 시절의 아이였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어떤 사물, 혹은 한 장면을 통해 불현듯 되살아난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범선, 군용차량, 열기구까지. 이것은 단순한 조립품이 아니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던 순수함과 몰입의 시간들이 다시 깨어난 흔적이었다. 삶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 같다.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아이가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블록을 맞추며 배웠던 세심함이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 조각, 한 조각 맞춰가다 보면 언젠가 완성된다고.


삶도 결국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범선처럼 방향을 잡고, 군용차처럼 단단히 다지고, 열기구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아이는 날마다 자란다. 나는 날마다 배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여전히 ‘조립 중’인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향해 만들어지는 시간, 이토록 아름다운 하루가 무심한 듯 흐르고 있다.


from 윤슬 작가

#윤슬에세이 #윤슬자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릴 수 없는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