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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깨달은 작은 회사의 가치

by 이진호

복학 후, 나는 게으름 부리지 않고 공부를 해야 했다. 졸업이 걱정될 수준이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 학기를 마칠 무렵 완전히 지쳤다. 당시는 IMF 경제위기가 터진 직후였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경제 위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취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가능한 늦게, 이 위기가 조금이라도 더 진정된 후에 졸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1학기 휴학을 결심했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함께 어떤 회사에서 일해 보자고 제안했다. 회사라기엔 규모가 작았다. 직원은 겨우 다섯 명, 50평 남짓한 아파트형 공장에서 실험 기자재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누구나 아는 전자회사에서 오래 일했던 분이라,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고,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아니었다. 주어진 업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회사의 운영과 제품 생산 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필요할 때마다 거들었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환경이었다.


그 회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


어느 날, 제품 납기가 임박했는데도 작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내일까지는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며 퇴근하셨다. 하지만 나와 후배, 그리고 그 회사의 막내인 김 주임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끼리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해 보자."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젊다고 해도 밤을 새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쉬어 가며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새벽 무렵,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 체력은 바닥나 있었지만,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득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사이, 출근한 사장님이 완성된 제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걸 다 해놨다고?!"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사장님은 정말 기뻐하셨고, 자랑스러워하셨다. 우리를 한참 칭찬해 주셨고, 두둑한 보너스까지 주셨다. 하지만 보너스보다 더 값진 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라는 점이었다.


이 일이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등 사장님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찾아서 했다. 그렇게 8개월을 보내고 복학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비록 말도 안 되는 작은 급여를 받았지만, 그곳에서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사장님을 찾아뵈었다. 그때 나는 대기업 취업이 확정된 상태였다. 사장님은 내게 함께 다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급여는 대기업 수준으로 맞춰 줄 테니, 예전처럼 자율적으로 일하면서 수익을 나누자." 심지어 "대기업에서는 월차 한 번 쓰려해도 눈치 보느라 힘들걸? 나랑 같이 일하면 ‘저 내일 쉽니다’ 한마디면 돼."라며 나를 잡아보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대기업에서 제대로 일하는 법을 배운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장님도 결국 내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아마,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거다.


그렇게 대기업에서 일을 배우느라 바쁘게 지내는 동안, 그 회사에서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회사 일에 지쳐갈 무렵, 나는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왜 그때는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기 때문에 피곤해도 즐거웠고, 보람이 있었다. 지금은? 자발적으로 밤을 새기는커녕,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만 있을 뿐, 내 일이라는 느낌이 부족했다.


다시 그 회사에 연락을 해봤다. 돌아갈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인수되었고, 사장님도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오랜만에 통화한 사장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반가워하셨다. 사장님 목소리에 그때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만약 사장님이 회사를 계속 운영하고 계셨다면, 나는 돌아갔을까?'


아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의 경험이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작은 회사라도 경영을 하는 입장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새로운 일을 어떻게 도전하는지, 회사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


그곳에서 배운 것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가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항상 원하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방향을 찾아가는 노력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쉽게 이직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지만, 도저히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때의 나는 자발적으로 밤을 새우며 일했다. 그 이후 밤을 새워 일을 한 경험은 많지만 대부분 자발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점 자발적으로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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