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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Sep 07. 2020

알만 한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이유

'이야기'의 힘

이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고 해보자.     

길을 가다 갑자기 두툼한 봉투가 눈에 띈다. 왠지 돈 냄새가 술술 나는 게 집어 올려서 확인해보니 현금 5,000만 원이 들어있다. 일단 주변에 돈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 돈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면,


길을 가다 쓰러진 노인을 발견했다. 인간의 도리로 재빨리 달려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렸다. 그런데 노인의 수행비서가 앞에 딱 서더니 어르신께서 지시하신 사례라면서 갑자기 현금 5,000만을 주는 것이다. 거절하는데도 사양 말라며 계속 손에 쥐여준다.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하겠는가?


두 가지 경우, 어느 쪽이 돈을 챙길 가능성이 큰가?     


대부분 두 번째 경우에 손을 들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첫 번째 경우, 내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누가 흘린 것일 수도 있고 주인이 없는 돈일지라도 자신은 이 돈에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좀 쌔애하니 무섭기도 하다...)


두 번째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자신이 베푼 선행의 대가다. 노인은 자기 목숨값이라며 어른 기다리게 하면 못쓴다고 얼릉 받으라고 재촉까지 한다. 내가 한 행동에 비해 과분한 보상인 건 맞다. 하지만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덕을 많이 쌓으라고 찾아온 행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의 차이점을 눈치챘는가?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애초에 구실이 너무 적어 이야기를 만들기도 애매하다. 두 번째는 간신히 명분은 챙겼다. 그래도 주고받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어 아직 자격 미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은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채워 넣는 것이다.


'어쩌면 조상님이 보내주신 거야', '그래, 내가 아니었으면 저 노인 큰일 났을 수도 있고, 목숨값이라잖아', '앞으로 나도 덕 많이 쌓고 많이 베풀면서 살면 되는 거야!'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다. 그대로 넙죽 돈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황송한 마음에 오히려 분에 넘치는 만큼 갚아야 한다면서 도덕적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라. 이야기는 남아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주고 오히려 기분이 개운케 한다. 이제는 즐겁게 돈 쓸 일만 남았다!


또는, 느닷없이 누군가가 다가와 내 얼굴을 때렸다고 상상해보자. 분노가 치밀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거린다. 상대방이 벌을 달게 받거나 마땅한 보상을 하지 않는 한 열기가 식을 것 같지 않다.


이처럼, 우리가 만드는 이야기의 구성은 대개 이런 식이다.     


좋은 일이 사람이나 사물에 일어나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좋은 일이 사람이나 사물에 일어나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

나쁜 일이 사람이나 사물에 일어나고, 그런 일을 당할 만하다.

나쁜 일이 사람이나 사물에 일어나고, 그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





똑똑한 사람도 다 똑같아!


소위 학식이 높다고 우리가 일컫는 직업군이 있다. 의사, 판사, 변호사, 회계사 등. 이들은 머리가 특별히 좋거나 일생의 절반 이상을 엉덩이를 붙이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와는 다르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만(잘 생각해보면 비인간적인) 행동할 거라는 오해를 받기가 쉽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건 폭넓은 학식이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건 이성과는 무관한, 그래 비(非)이성적인 영역이니까. 그래서 천재와 미치광이가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생겼고, 인생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


출처 : 나무위키


여기에 유명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가 있다. 다만 의사로서는 손님이 없어 틈틈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한 한 권의 추리 소설이 세상을 뒤집어 놓는데 이 의사가 바로 코난 아서 도일이다. 셜록 홈즈를 읽어보면 그가 캐릭터 홈즈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그가 역사 속 실존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말이다. 아서는 소설뿐만이 아니라 가정, 정치, 사회, 군사, 경제, 사법, 언론, 국제 문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나중에 심령술에 빠졌다면, 믿겨지는가?


실상은 이렇다. 그는 본처에게서 낳은 아들 둘이 있었다. 그러나 재혼한 둘째 부인의 날로 심해지는 이간질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금전적인 지원을 끊었다고 한다. 어느 날 둘째가 1차 세계대전에 복무 중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 직후 꿈에 나타나 그를 원망했다고 한다.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우연히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심령의식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모든 걸 바꿔 놓았을 것이다. 내 아들 킹슬리는 아버지에게 외면받고 쓸쓸히, 원망의 빛을 눈에서 거두지 못한 채 죽어선 안 되었다. 나는 아이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 만나서 용서를 구할 것이다. 이런 그에게 있어 심령술은 마지막 동아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령술을 접하면서 그가 평생 갈고 닦은 학식이나 수여 받은 기사 작위 따위는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족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유령과 심령술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든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만한 일에 일생을 바치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꿈


출처 : 나무위키


히틀러는 어느 날 세계 정세를 꿰뚫는 핵심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인종은 유전자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특성을 가진다. 특성은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나뉘며, 그것이 인종 간 차이의 바탕이 된다. 인종 간에 피가 섞이기 시작하면 그 우월한 유전자도 점점 묽어지고 인간은 퇴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류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 고등 인종은 그 순수 혈통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하등 인종을 지배함이 마땅하다.


그는 애석하게도 독일 아리아인이 고등 인종임을 스스로 검증하고 다른 하등 인종과 피가 섞이는 일이 절대 있어선 안 된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린다. 이때, 유대인의 활약으로 세계 곳곳에서는 언론, 의회 민주주의, 국제평화기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머지않아 독일의 경제시스템을 망가트리고 세계화를 가속해 아리아인의 순수 혈통 보존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 이야기에서 그는 인류의 영웅이고, 유대인은 지구에서 쓸어버려야 할 사회적 기생충이며 동시에 인류의 적이다.


히틀러의 꿈은 이렇다. 독일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이다. 오직 아리아인만이 고등 인종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량학살과 전쟁의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지만, 유대인을 비롯한 몇 종류의 인간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방해만 되므로 없어지는 게 백번 천번 낫다. 타국을 침공하는 건 애석한 일이지만 아리아인의 인구증가를 위한 영토 확장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나치 독일에서 소개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야기꾼이 있다. 바로 나치 독일 선전부 장관 괴벨스다.



출처 : 나무위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괴벨스 왈,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그럼 조국은 사랑하지 않는 거냐? 전쟁이 나면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동료들의 송장에 등 돌리고 가족에게로 뛰어갈 놈이로구나. 네놈에게는 애국심이 없는 거냐? 그래. 친일파구나. 나라를 팔아먹을 놈이 바로 여깄구나. 옮거니, 네놈이 나라 안팎으로 일어나는 모든 원흉의 원인이구나. 이 자를 죽여라! 조국을 위해'


뭐, 이런식이다.





종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작권 : Bigstock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니체가 한 말이다. 그는 영적 종교가 곧 종말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 내다봤다. 과학 혁명이 사람들에게 많은 이데올로기를 가져다주었고 그것이 곧 영적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저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영적 종교는 초자연적인 믿음에서 비롯하기에 증명할 수 없고, 또한 한번 믿기 시작하면 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물론 검증하기 굉장히 어렵겠지만, 그런 면에서 영적 종교와 비교해 대단히 불완전하다. 이제 완전무결한 믿음은 없다. 이에 그는 말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방황하고 잡을 듯 잡히지 않는, 손아귀 사이로 흘러나가는 진리를 보며 고통스러워한다. 또는 젊은 시절에 당한 부당한 고통과 괴롭힘을 보상받기 위해 평생을 애쓰며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종교는 이런 우리들에게 소리 없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전능하신 분은 모든 답을 알고 계시며 영원한 행복의 비밀도 알려줄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모든 건 그분이 하신 '이야기'에 담겨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처음에는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듣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엄청난 서사의 한 흐름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모두가 공통적 목적 아래 하나가 됨을 깨달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나름의 의식을 가진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왜 그러는지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분의 하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모든 행위에 의미가 생길 것이다. 공동의 적도 필요하다. 적은 보통 내적 혼란을 투사하는 형태로 존재하며 우리가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하나로 뭉친 덩어리다. 또한 '악'이라고도 부른다.


교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교의 교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우리는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지난날의 죄는 모두 '악'의 꾀임이므로 자책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날까지의 선행은 모두 다음 생에서 보답받으리라. 


그들의 꿈은 이렇다. 우리가 믿는 것을 믿고 똑같이 행동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은 모두 '악'의 탓으로, 우리가 당할 이유는 없다.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좋은 일을 누릴 자격이 없다. 나쁜 일을 당해도 싸다. 싫으면 이쪽으로 오던가.








참고 자료 -   나무위키

                    희망 버리기 기술 (저자 마크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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